1991년 주민 김화봉씨의 신고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현,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에서 이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모두 10기의 백제고분이 조사되었다.
저석리고분군은 전곽분(塼槨墳) 외에 석곽옹관묘(石槨甕棺墓), 석곽분(石槨墳) 등 다양한 묘제로 구성되었다. 그 중 전곽분은 1기로 조사 전에 이미 원형의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고 경작으로 인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며 주변에는 다량의 무문전(無文塼)이 흩어져 노출되어 있었다.
전곽분은 장축방향을 동서에서 24°편북해 설치된 수혈식전곽분이다. 암적색 점질토와 풍화 암반질의 석비례층이 동서로 양분되는 생토면에 장방형의 묘광(墓壙)을 설치하였다. 묘광의 규모는 길이 250㎝, 너비 110㎝, 깊이 70㎝로 추정된다. 축조 방식은 네 벽을 무문전으로 축조한 형태로 동서벽이 남과 북의 양 장벽에 내접한 형태를 하고 있다.
동벽 하단부인 1단은 길이 34㎝되는 3매의 장방형 벽돌을 수직으로 세우고, 2단은 옆으로 나란한 형태로 쌓았다. 2·3단은 두께 3㎝의 장방형 벽돌을 장변이 벽면이 되도록 하고 다른 한쪽에 반으로 자른 벽돌을 단면이 벽면에 향하도록 2단을 쌓았다. 4·5단은 반으로 자른 벽돌을 단면이 벽면이 되도록 3매를 놓고 쌓았다.
6단은 2단과 같은 형태로 쌓았고 7·8단은 좌우편 말각부를 줄여서 높이를 조절하였다. 동벽을 제외한 서벽, 남벽, 북벽은 전체적으로 축조방식이 동일하다. 장방형의 무문전을 가로로 세우고 그 위에 반 자른 소형 벽돌을 옆으로 나란히 쌓기로 축조하였다.
서벽은 장방형 전 2매를 가로로 1단 세우고 그 위에 반으로 쪼갠 벽돌을 단면이 벽면이 되도록 3매를 놓은 뒤 9단을 옆으로 나란히 쌓았다. 상단부는 좌 · 우편 말단부를 줄여서 잡석을 쌓아 마무리하였다. 남벽과 동벽은 각각 6매의 장방형전을 가로로 세워 하단부를 처리하였다. 그 위의 2단부터는 옆으로 나란히 벽돌을 쌓아 올렸으며 최상단까지 8단이 현존해 있다.
묘실 바닥은 생토면에 적갈색 점질토를 다진 후 경질의 기와와 함께 할석으로 보충해 깔았다. 내부는 도굴로 인해 교란된 상태이다.
전곽분 묘실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없다. 다만, 전곽분 축조 주재료인 무문전이 크기에 따라 장방형 벽돌과 반으로 자른 벽돌의 2종으로 구분된다. 장방형 벽돌은 태토에 약간의 사립이 섞이고 색조는 회청색을 띠고 있으며 양면에는 승석문이 시문되어 있다. 반으로 자른 벽돌은 장방형 전을 반파해 사용한 것으로 무공(無孔)무문전과 유공(有孔)무문전의 2종이 있다. 그리고 전곽분 주변 트렌치 조사과정에서 직구소호(直口小壺)인 경질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전곽분에 사용된 무문전은 송산리 무령왕릉 연도 폐쇄용으로 사용된 무문전이나 대통사지 건물지 내부 무문전 등 공주지방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은 유형이다.
연대는 전곽분이 위치한 곳에서 서남쪽 3km 지점의 부여 정동리 요지에서 출토된 문양전과 무문전에 대한 수급관계를 연관 지어 보았을 때, 대략 6세기로 비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