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분들의 묘실의 길이는 대체로 250㎝ 내외로 폭과 높이에서 두 가지 형태로 구별된다. 하나는 묘실의 높이가 140㎝ 이상인 것으로 내부에서 사람의 활동이 가능하며 편재된 널길을 가지고 있는 횡혈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굴식 고분)이다. 다른 하나는 문주석과 짧은 벽체시설을 가지고 있으나 높이가 80㎝에 불과한 것으로 석실이라기보다는 앞트기식 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墳: 앞트기식 고분)으로 볼 수 있는 구조이다.
이 중에는 세 벽은 할석과 판석을 이용해 축조하고 나머지 한 벽은 판석과 할석을 함께 사용해 세우거나 뉘어 쌓아 2단으로 축조한 후, 석곽 중앙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4매의 판석을 세워 동서 2개의 묘곽을 만든 특이한 구조도 있다.
석재는 대부분 판석과 할석을 혼용하였다. 천정부의 형태는 맞조림식 평천정, 단면 제형(梯形)의 평천정이 있다.
출토유물로는 많은 수의 관정이 출토되어 목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토기 5점과 철정 수십 점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모두 연질로 유개삼족기(有蓋三足器: 뚜껑있는 세발토기)를 제외한 4점의 토기 표면에 흑색 유액이 입혀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토기는 아직까지 부여지방에서만 확인된 흑색 와질토기와 흡사해 대체적인 제작시기를 백제 후기로 추정할 수 있다.
유개각진어깨삼족기는 배신(杯身)이 매우 얕고 다리가 각진 어깨부에 거의 접해 붙어 있으면서 약간의 면을 이루도록 다듬은 특징이 있다. 공주 중장리 돌방무덤( 공주 중장리 고분)에서 출토된 유개삼족기나 보령 구룡리 돌방무덤( 보령 구룡리 고분)에서 출토된 유개삼족기의 기형과 공통되어 양식상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경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세발토기를 공반하며 판석과 할석 혼용의 맞조림식 횡혈식 돌방무덤인 제8호분의 연대는 궁륭형에서 변화된 맞조림식이 출현하는 6세기 중반경보다는 약간 늦은 6세기 후반경으로 볼 수 있다. 지선리 고분군은 대체로 이 시기를 중심으로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구덩무덤은 도굴로 인해 내부가 교란되었다. 그러나 부여 초촌면 소사리( 부여 소사리 고분군)의 백제 후기 구덩무덤과 보령 창암리( 보령 창암리 고분)의 백제 구덩무덤 등이 발견된 예로 보아 돌방무덤들과 같은 시기에 조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