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례 ()

유교
의례·행사
오례(五禮)의 하나로, 외국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는 국가의례.
정의
오례(五禮)의 하나로, 외국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는 국가의례.
개설

빈례는 중국의 명(明)과 청(淸), 일본, 유구국(琉球國)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는 예를 말한다. 전통시대에 우리나라가 주변 나라들에 취한 외교 정책을 흔히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네 글자로 표현한다. 중국(명·청)에는 사대 정책으로, 일본이나 유구 등의 나라에는 교린 정책을 폈다는 것이다. 이는 주변국 간에 정치적 혹은 군사적으로 생기는 긴장 관계를 완화하고 상호 공존하기 위한 외교 정책이었다.

연원 및 변천

유학의 기치를 내걸고 건국한 중국 황실이나 제후국 왕실은 현실에서의 유학 실천을 위해 국가 의례를 다섯 가지, 즉 오례로 규정지었다. 오례는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를 가리킨다. 그 중 국가 외교에서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의례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때문에 중국이나 한국에서 국가 의례를 다섯으로 규정지을 때 빈례는 나머지 길례·가례·군례·흉례에 비해 분량은 적었지만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의례였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학(國學)으로 채택하여 예치(禮治)를 강조한 국가였다. 조선의 국가 전례는 태종대부터 정비에 들어가 세종대에 본격적으로 정리되었다. 이때 국가 전례는 길례·가례·빈례·군례·흉례 순으로 된 오례 체제를 갖추었고, 조선 왕실 최초의 국가 전례서인 『세종실록』 「오례」(1451)에 정리되었다. 『세종실록』 「오례」 이후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4),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1744),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1751), 『국조오례통편(國朝五禮通編)』(1788), 『춘관통고(春官通考)』(1788) 등은 모두 오례 체제를 갖춘 국가 전례서였다. 이 중 『국조속오례의보』는 『국조속오례의』를 보완하기 위해 편찬되어 길례와 가례의 내용만 있고 나머지 빈례, 군례, 흉례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다. 이상의 국가 전례서는 오례라는 큰 틀을 유지하되, 『국조속오례의보』를 제외하고 빈례를 반드시 수록하였다.

내용

국가 의례를 규정한 국가 전례서에 수록한 빈례 관련 의례는 다음과 같다.

○ 『세종실록』 「오례」: 연조정사의(宴朝廷使儀), 왕세자연조정사의(王世子宴朝廷使儀), 종친연조정사의(宗親宴朝廷使儀), 수인국서폐의(受隣國書幣儀), 연인국사의(宴隣國使儀), 예조연인국의(禮曺宴隣國儀)

○ 『국조오례의』: 연조정사의, 왕세자연조정사의, 종친연조정사의, 수인국서폐의, 연인국사의, 예조연인국사의

○ 『국조속오례의』: 무(無)

○ 『춘관통고』: 연조정사의(原儀대로 함), 왕세자연조정사의(原儀대로 함), 종친연조정사의(原儀대로 함), 수인국서폐의(原儀대로 함), 연인국사의(原儀대로 함), 예조연인국사의(原儀대로 함), 왜사접대구례(倭使接待舊例), 연례송사(年例送使), 왜사 혁파(革罷), 차왜(差倭), 약조(約條), 개시(開市), 왜관(倭館), 왜관 수리, 통신사(通信使), 국서식(國書式), 서계식(書契式), 일광산치제(日光山致祭), 왜국 답서(答書), 왜국 회답 서계(書契), 일행회수예단(一行回受禮單), 접위관(接慰官), 고실(故實), 통신사적(通信事蹟), 부유구국(附琉球國), 부야인급구변섬라등제국(附野人及久邊暹羅等諸國)

빈례는 외국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는 예이다. 이 중에서 『춘관통고』에는 사신 접대와 관련한 각종 의식 절차[儀註]만이 아니라 고실을 수록하고 있다.

국가 전례서에 수록된 빈례를 보면,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의례 면에서는 큰 변화가 없고, 『춘관통고』에 일본과의 외교와 관련하여 좀더 구체적인 항목이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745년(영조 21) 영조가 예조정랑 이맹휴(李孟休)에게 명하여 예조가 담당하는 업무 전반을 정리하도록 한 『춘관지(春官志)』 범례(凡例)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오례 가운데 빈례만 따로 작성하되, 유구와 야인(野人)을 접대하는 예는 끊어져서 통신(通信)을 하는 일본에 대해 가장 상세히 기록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국가 전례서의 규정은 일본과의 통신을 제외하고 큰 변화가 없지만 실제 행례(行禮) 때에도 그러했을까 하는 점이 문제이다. 인조대에 중원의 주인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었다. 조선 중화를 주장하는 조선 정부에서 명 사신에게 하던 영접(迎接) 의식을 청 사신에게 동일하게 적용했을까 하는 점이다. 소위 사대의 주인이 명이 아닌 청으로 바뀌면서 의례 또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흉례 절차 중에 승하한 조선의 국왕을 위해 중국에서 파견한 사신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의례를 꼽을 수 있다. 곧, 중국 황제가 내린 시호와 제사 및 조부(弔賻)를 맞이하는 영사시제급조부의(迎賜諡祭及弔賻儀)‚ 중국 황제가 내린 부물(賻物)을 받는 사부의(賜賻儀)‚ 중국 황제가 내린 시호를 받는 사시의(賜諡儀)‚ 승문원 관원이 황지(黃紙)에 고명(誥命)을 전사(傳寫)하고 의례를 마친 뒤 황지를 불에 태우는 분황의(焚黃儀)‚ 중국 황제가 내린 제사를 받는 사제의(賜祭儀) 등이다. 명에서 청으로 교체된 이후에도 이 의절들은 『국조오례의』에 실린 것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문관지(通文館志)』를 통해 알 수 있다. 교외에서 칙서를 맞이하는 교영의(郊迎儀), 인정전에서 접견하는 인정전접견의(仁政殿接見儀), 편전에서 칙서를 받는 편전수칙의(便殿受勅儀), 새로 즉위한 국왕을 책봉하는 책봉의(冊封儀), 조제하는 조제의(弔祭儀) 등을 실행하였다는 점이다. 명 사신이 아닌 청 사신을 맞이할 때에는 이렇듯 의식 절차가 바뀐 것이다.

그 밖에도 『통문관지』에는 청의 칙사와 관련한 여러 규정과 절차들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국가 전례서에 실린 것과 상당히 다른 내용을 싣고 있다. 즉 사대의 대상이 명에서 청으로 교체되면서 국가 전례서의 규정과 무관하게 실제 행례의 절차 또한 바뀐 것이다. 오례의 다른 의례와 달리 빈례에서는 국가 전례서의 기록과 실제 행례할 때에 차이가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중원의 주인이 명일 때에는 국가 전례서를 참고하고, 청으로 바뀐 뒤에는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관련 등록(謄錄)과 『통문관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민창문화사 영인본‚ 1994)
『국조오례통편(國朝五禮通編)』(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
『춘관지(春官志)』(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영인본, 2013)
『춘관통고(春官通考)』(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영인본‚ 1975∼1977)
『통문관지(通文館志)』(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영인본, 2006)
『동문휘고(同文彙考)』(국사편찬위원회 영인본, 1978)
「명·청의 사제(賜祭)·사시(賜諡)에 대한 조선의 대응」(이현진, 『조선시대사학보』 6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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