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방공리(外方貢吏) 및 번상 군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세공물(稅貢物)을 일시 보관하며, 그것을 매매(방납)하는 것을 맡아 하던 상인들이었다.
경주인(京主人)에 대칭해 쓰인 용어이다. 즉, 외방공리는 지방관을 대리한 공납책임자요 각 사(司)의 이노(吏奴)는 실제적인 수납책임자이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한 것이 곧 사주인이다.
따라서, 지방 공리가 사주인의 중개 없이 직접 중앙 각 사에 납공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또 사주인의 경제 활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준 계층은 중앙 각 사의 하리(下吏)들이기 때문에 이들과 사주인과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결속되었다.
실록에 보이는 사주인에 대한 최초 기록은 1430년(세종 12) 2월, 각 도의 조운선이 한강변에 이르면 지방 공리들이 싣고 온 미곡을 자기집 앞에 가져다 두고 이를 수탈한 강변의 사람이 ‘주인’이라 칭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1446년 3월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산릉을 조영할 때 동원된 동·서강흥리인(東·西江興利人)이나, 문종 즉위년 공물대납을 금지하는 사간원의 상소에 나오는 ‘모리지도(謀利之徒)’를 공물대납제와 관련해 볼 때 이들을 사주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공납제의 변천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주인의 명칭이 정식으로 사용된 것은 1471년(성종 2)부터이며, ≪경국대전≫에서도 처음으로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이후 공납제가 대동법으로 개정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그 명칭도 사주인·각사사주인(各司私主人)·각사주인·강(江)주인·방근거민(傍近居民)·경강거인(京江居人)·초주인(草主人) 등이 많이 쓰였다. 이 밖에 흥리인(興利人)·방납지인(防納之人)·방납모리지도(防納牟利之徒)·모리지도(牟利之徒)·시정인(市井人)·시정모리지도(市井牟利之徒) 등도 같은 뜻으로 쓰이다가 1573년(선조 6) 이후부터는 점점 공물주인(貢物主人), 즉 공인(貢人)으로 통칭되었다.
이들의 신분은 대개 천인(노복)·시정상인 또는 각 사의 하리 출신이다. 이들은 방납의 자본을 얻기 위해 부상대고(富商大賈)와 연결하기도 하고, 또 원활한 방납 활동을 하기 위해 권세층과 결탁하기도 하였다.
사실, 지방 각 관이 납공해야 할 중앙 기관은 여러 곳이므로 지방관을 대리해 이들 사주인이 중앙 각 사의 공납을 독점, 방납하였다. 또 각 사에는 여러 사주인이 있어 그 이노와 연결, 방납을 하고는 몇 배의 이득을 취해 분배하였다.
초기에는 천인 계층이나 권세가의 노복, 또는 서울 상인의 일부가 사주인 노릇을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뒤 모든 궁가(宮家)나 사대부 등 권세층이 방납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사주인과의 연결이 더욱 많아졌다. 심지어는 노비신공마저 방납하기에 이르렀다.
제도의 모순과 정치기강의 문란을 틈타 발생한 사주인은 명종조 이후부터 직업인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선조조에 이르러서는 확고한 직업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어 이후 큰 폐단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경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