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국언(國彦), 호는 아곡(鵝谷).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의 현손이며, 이정남(李井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시술(李時術)이고, 아버지는 참판 이세필(李世弼)이며, 어머니는 박세모(朴世模)의 딸이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의 재종형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99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에 올랐다. 이 해 8월 새 예문관원으로 송정명(宋正明) 등 4인을 천거하자 김진구(金鎭龜)가 난색을 나타내 이들의 처리 문제로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이것은 과거 송정명 등이 성균관에 있을 때 윤증(尹拯)의 소환을 청한 상소에 송시열(宋時烈)을 비난하는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사서를 거쳐 1701년 지평으로서 이세석(李世奭)의 과거시험 부정을 탄핵했으나 왕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희빈 장씨의 사사에 적극 반대하다가 파직된 최석정(崔錫鼎)·이명세(李命世)를 신구하다가 도리어 삭탈관직되어 선산으로 유배되었다.
1705년에 풀려나 정언에 등용되고, 사서·부수찬을 거쳐 이듬해 2월에는 문학으로서 필선 유태명(柳泰明)과 함께 경상좌우도의 암행어사로 다녀왔다. 이어 부교리·이조정랑·부수찬·집의·응교를 거쳐 1708년 12월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영서 3읍(춘천·횡성·홍천)과 영동 9읍에 대한 양전 개변을 실시해 원전대동(元田大同) 2두(斗)를 감해 1결(結) 1년 소납(所納)을 14두로 정하고, 속전대동(續田大同)·삼수량(三手粮)을 모두 감하도록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견은 이듬 해 7월에 가서야 시행되었다.
그 뒤 이조참의·대사성·대사간·승지·강화유수를 역임하고, 1716년 공조판서로 있을 때 윤선거(尹宣擧) 문제를 논하다가 노론 일색인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곧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721년(경종 1) 강화부유수에 재임되고, 동지의금부사, 형조·예조·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22년 비국당상(備局堂上)에서 북방 소요에 대한 국력 강화책으로 공조판서 조태억(趙泰億)의 내수외양(內修外壤)을 공박하고, 자강지도(自强之道)로서 오로지 왕의 일심노력과 억사절재(抑奢節財: 사치를 줄이고 재물을 절약함)·근정수덕(勤政修德)·인재양성·민심단결 것뿐이라고 강조하였다. 조세·한재·조창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1725년(영조 1) 임인옥사로 삭직되었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호조판서·지경연사(知經筵事)·병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쳤다. 그리고 이듬 해 우의정, 1729년 좌의정·판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가, 1736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