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프랑스 조계(租界) 안에서 유진동(劉振東)·안병무(安炳武)·김기승(金基升)·구익균(具益均) 등 10여명이 학문의 연구증진과 과학지식습득을 위하여 1928년 4월 조직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항일독립투쟁을 목표로 방향전환을 모색하였다. 1919년이래 상해에 한국인 학생이 매년 증가함에 따라 최초로 상해한인학생회를 조직하고 이에 화동학생회(華東學生會)를 분립하였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운동에 몰두하다가 두 회를 다시 모아 이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퉁지대학(同濟大學)의 유진동·이춘환(李春環) 등이 중심이 되었다. 1930년 국내에서 그 전해인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다시금 고무되어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1년 7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발생하여 당시 민족파 독립지사의 독립운동이 치열해지자 이에 적극 가담,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본관헌의 감시를 피하여 임시정부요인을 후원하였으며 중국정부의 지원을 요청하는 여론환기에 주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요인의 경호업무까지도 맡았다. 그러나 일본관헌의 탄압이 심하여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1932년 임시정부를 따라 난징(南京) 등지로 갔다.
이 회의 임원은 1932년 가을 현재 서무위원에 유진동, 재무위원에 안병무·김기승, 외교위원에 구익균 등으로 각기 고유업무를 분담하였다. →상해학생연합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