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순조 12) 조수삼(趙秀三)이 지은 한시. 1811년에 일어났던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소재로 하여 1812년 7월에 쓴 것이다. ≪추재집 秋齋集≫ 권2에 실려 있다. ≪풍요삼선 風謠三選≫의 권3에도 실려 있다. 모두 1,860언 372구의 장편 오언고시이다.
<서구도올> 앞에는 작품의 창작동기를 밝힌 서문이 있다. 서구란 서쪽의 도둑인 홍경래 일당을 지칭한다. 도올은 초(楚)나라의 역사로 곧 역사를 지칭하는 것이다. ‘서구도올’은 홍경래의 난을 마치 역사를 쓰는 입장에서 쓴 시라는 의미를 가진다.
<서구도올>의 내용을 몇 단락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1구∼50구에서는 난이 끝난 뒤의 비참한 정황 및 난전(亂前) 관서지방(關西地方)의 순미(純美)한 풍속과 부요(富饒)한 생활을 그렸다. 51구∼84구에서는 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하여 풍속이 야박해짐과 계속되는 흉년, 관의 수탈로 인한 민중생활의 비참상을 그렸다.
<서구도올> 85구∼124구에서는 난의 시작과 가산군수(嘉山郡守) 정시(鄭蓍)의 죽음, 선천(宣川)·박천(博川)·정주·용천(龍川)·태천(泰川)·곽산(郭山)의 함락을 그렸다. 125구∼144구에서는 함락된 고을의 내력과 이 고을에서 내응, 항복한 자들에 대한 비난을 그렸다. 145구∼186구에서는 송림리(松林里)에서 있었던 홍경래군과 관군과의 전투, 홍경래군의 패퇴(敗退)를 그렸다.
<서구도올> 187구∼355구에서는 서울 정부군(政府軍)의 출동, 잃었던 고을의 수복, 정부군과 홍경래군과의 전투, 정주성의 폭파와 함락, 홍경래의 죽음과 그 일당의 섬멸, 난중(亂中)에서 유린된 민중의 비참한 정황을 묘사하였다. 356구∼372구에서는 예의염치로 다스려 다시는 이러한 난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작자의 말을 기록하였다.
홍경래의 난에 대한 문헌은 다수 남아 있다. 그러나 시로써 이와같이 난 전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경우는 <서구도올> 외는 없다. 이 시 전체를 이끌어 가고 있는 작자 조수삼의 시점은 전적으로 홍경래의 처사를 비난하는 데에 모아지고 있다. 따라서 당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던 사회현실에 대한 구조적인 파악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조수삼이 홍경래의 입장이나 난의 발생원인을 객관적인 눈으로 파악하고 기술해낸다는 것 자체가 이미 반역(反逆)일 수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작자가 중인출신(中人出身)이며, 조인영(趙寅永)을 비롯한 풍양조씨(豊壤趙氏)와 지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점이 보다 객관적인 상황파악을 가로막았을 것이다.
이것은 곧 정약용(丁若鏞)이 <하일대주 夏日對酒>에서 홍경래의 난에 대해서 서술하면서 서북인(西北人)의 소외된 처지에 대해서 깊은 동정을 나타낸 것과는 완전히 대척적인 입장에 서는 것이다.
<서구도올>이 보여 주고 있는 사실성(事實性)과 풍부한 시어(詩語)의 구사는 종래에 보기 드문 성과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