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학은 인류 역사시대에서 서양 세계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보고 그 문화의 변천 과정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한국 서양사학의 역사를 추적해 보면, ‘서양’이라는 실재가 ‘서양사’를 낳았다기보다는 ‘서양사’라는 학제가 ‘서양’을 상상하게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즉, 서양사학은 가상의 실재인 ‘서양’의 역사를 재현하는 학문이라 할 수도 있는데, 여기에서는 한국의 서양사학과 제국의 오리엔탈리즘, 서양사와 국사가 맺어 온 서구 중심주의의 담론적 공모 관계를 드러내고 서양사의 해체를 21세기 한국 역사학의 과제로 제시한다.
서양사학은 가상의 실재인 ‘서양’의 역사를 재현하는 학문이다. 독립된 학제로서의 ‘서양사’는 서양을 당연한 실재라고 전제한다. 서양이라는 실재가 먼저 있고 그 역사를 재현한 것이 서양사라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서양사라는 개념과 학문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은 도치된 상식이다.
서양이라는 실재가 서양사를 낳았다기보다는, 서양사라는 학제가 서양을 상상하게 만든 것이다. 지식-권력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서양사학과 제국의 오리엔탈리즘은 우월한 서양과 열등한 동양이라는 이분법을 재생산하는 담론적 공모관계에 있다.
서양사학이 정작 서양에는 없고 일본과 한국에만 있다는 점도 상징적이다. 서양사학은 메이지 일본에서 탄생한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역사학의 3분과 체제에 그 기원이 있다.
3분과 체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한 메이지 일본의 민족적 우월감을 정당화하는 사상적 기제였다. 동양사 내지는 동양사학이 조선과 중국을 후진으로 못 박는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의 서사였다면, 국사는 정체된 동양 사회와 달리 서구적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일본의 역사적 예외주의를 정당화하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이데올로기였다. 상상된 서양의 역사인 서양사는 이들 모두를 비추는 헤게모니적 거울이었다.
21세기 한국의 서양사학은 서양을 모방하려는 욕망과 열등감 사이에서 동요한 일본제국이 만든 식민주의적 지식-권력의 유산이다. 물론 (포스트) 식민적 상황의 한국에서 역사학의 3분과 학제가 갖는 정치성은 일본제국의 그것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경성제국대학의 사학 전공은 국사(일본사)-동양사-조선사라는 변형된 3분과 체제를 기본으로 하고, 서양사는 교양 과목으로 배치하였다. 이는 타이페이제국대학의 역사 전공이 국사-동양사-남양사(南洋史)로 편제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조선사와 남양사 전공이 서양사를 대체한 이 학제는 오리엔탈리즘의 주체이기보다는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의 담론적 위치를 반영한다.
8 · 15 광복 이후 한국의 서양사학은 교양 과목의 신세를 벗어나 다시 일본제국의 3분과 체제로 복귀하게 된다. 미군정은 미국 대학의 서구문명론(western civilization)을 도입하여 서양문화사, 서양의 역사와 문명 등의 교양 과목을 가르쳤다. 서양문화사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 미국의 발명품으로, 급증하는 남동부 유럽 이민자들에게 미국은 곧 서양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줌으로써 선진적 미국문화로의 동화를 촉진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미국이 유럽보다 더 서양적이며 몰락하는 유럽을 대신한 서양문명의 보루라는, 서구 중심주의와 인종주의, 미국 애국주의가 서양문화사를 통해 통합되었다. 이는 다인종 이민 국가 미국에서 서구 백인 이민자들의 인종주의적 헤게모니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지구적 지성사의 맥락에서 볼 때, 독립 대한민국의 서양사학은 메이지 일본의 역사학 3분과 체제와 미국의 애국주의적 서양문화사를 자양분으로 성장하였다. 근대적 학제로서의 한국 서양사학의 역사는 이처럼 지구사적으로 전개된 학문의 제국주의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과 서구 중심주의의 흔적이 많다고 놀랄 것은 없다.
국내로 눈을 돌리면, 제도로서의 서양사학이 독립된 학제로 성립한 것은 유신(維新) 이데올로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1969년 서울대학교 사학과의 분과와 서양사학과의 탄생은 국민교육헌장의 반포, 3선 개헌, 민족 주체성과 국적 있는 교육의 강화, 국정 국사 교과서의 등장 등 일련의 조치들과 맞닿아 있다.
근대화 과정인 메이지 유신과 10월 유신의 모방 관계를 볼 때,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일본제국의 학제로의 회귀는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국사가 개발 독재의 민족주의적 동원 체제를 정당화하는 주요 학제로 등장하면서, 서양사는 국사의 보조 장치 정도로 여겨졌다. 부르주아적 휘그파 역사관에 입각한 한국의 서양사학은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 계몽사상의 한국적 변이로서의 실학, 근대화론 등 서양을 모델로 하는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 과정을 증명하는 데 필요한 비교사적 틀을 제공하는 도구적 학문으로 존재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해방 이후 한국 서양사학의 선구자들이 봉건제와 자본주의 이행, 르네상스와 계몽사상, 부르주아 혁명,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 근대화론 등에 큰 관심을 가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국사와 서양사가 공모하여 서양의 발전 과정에 버금가는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 과정을 찾아가는 근대 한국 역사학의 서사를 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서양사학 또한 민족주의적 국사와 보편적 서양사의 서구 중심주의적 공모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식민주의와 봉건제의 완강한 잔재들,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허약성과 반봉건성, 개발 독재의 폭력적 정치 양식, 미성숙한 노동자 계급, 허약한 의회 민주주의, 강력한 후견인적 국가의 존재, 근대적 개인 주체의 미성숙 등 서구 자본주의의 고전적 발전 경로와는 다른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특수성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프로이센적 길’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서사를 적용한 것이었다.
모리스 돕과 폴 스위지 논쟁으로 알려진 서구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의 자본주의 이행 논쟁, 일본의 강좌파-노농파 논쟁과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 전후 독일 역사학의 ‘특수한 길’ 테제에 대한 한국 마르크스주의 사학의 비상한 관심은 그러한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한국의 서양사학이 자양분을 획득한 휘그적 부르주아 역사관과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얼핏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잉글랜드의 자본주의 발달사를 보편적 모델로 설정하고 거기에 비추어 일본, 독일, 한국, 중국, 인도, 중동, 남미, 아프리카 혹은 기타 비서구 지역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 발전의 후진성 혹은 파시스트적인 일탈을 분석하는 비교사적 설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의 역사적 발전 경로에서 얼마나 가깝고 먼가를 기준으로 자신의 후진성을 가늠해온 동유럽의 역사 서술, 서구라는 거울에 비추어 자기 역사의 특수성 담론을 구성해 온 독일사의 특수한 길 테제, 세계사의 단일한 시계열 속에 자기 역사를 억지로 삽입했던 일본의 강좌파, 그리고 그 유산을 이어받은 전후 한국의 서양사학은 모두 자신을 비추어보는 헤게모니적 거울로서의 영국을 모델로 하는 서양사를 인식론적으로 전제하였다.
문제는 비서구가 서구라는 헤게모니적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는 순간, 역사의 ‘단일성’(singularity)이 ‘특수성’(particularity)으로 슬그머니 치환된다는 점이다. 그 결과 우열이 없는 역사적 차이가 서구를 정점으로 하는 역사 발전의 위계적 질서 속에 편입되고, 비서구의 특수한 역사는 서구적 보편으로부터의 일탈 정도와 거리에 따라 차등이 매겨진다.
"산업의 선진국들은 저발전국들에게 그들의 미래상을 보여줄 뿐"이라는 『자본론』 1권의 서문은 세계사가 단일한 역사적 발전 경로를 따른다는 ‘역사주의’의 단선론적 구도를 잘 보여준다. 역사주의는 지구 위 모든 지역의 역사를 하나의 시계열 안에 배치함으로써, 공간을 시간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세계사를 단일한 진화론적 시계열 안에 배치하는 역사주의의 구도 속에서 이제 서구와 비서구, 서양과 동양, 북반구와 남반구 같은 공간의 차이는 선진과 후진 사이의 진화론적 시간의 차이로 전화되는 것이다.
역사주의에 빠진 비서구의 역사가들은 자신의 역사 속에서 서구적 발전의 특징인 합리주의, 과학, 자유와 평등, 중산층, 도시의 발전, 인권과 참정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찾아내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식민주의 역사학이 규정한 무역사 민족이 아니라 서구와 같은 역사 민족임을 입증하고 인정받기 위한 '인정 투쟁'이 비서구 역사학의 핵심 과제가 되는 것이다. 서구와 비서구, 혹은 서양과 동양의 간격이 좁혀질 수는 있지만 결코 메꾸어질 수 없다는 데서 이 역사학적 인정 투쟁은 비극의 서사가 된다.
자신의 고유한 역사 속에서 서구의 역사와 유사한 점들을 샅샅이 찾아낸다고 해도 그것은 유사한 것일 뿐 완전히 똑같을 수 없는 것이다. 서구의 보편사와 유사한 점들을 찾아내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정품과 짝퉁의 차이는 더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서구가 보편의 깃발 아래 헤게모니적 거울의 위치를 차지하는 한 선진화된 서구와 후진적 비서구의 차이는 영속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포스트식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서구의 헤게모니적 거울에 비추어 우리도 자생적 근대가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인정받으려는 비서구 역사학의 인정 투쟁은 애초부터 결과론적 서구 중심주의를 껴안고 출발한 것이다.
한국의 역사 서술에서 서구 중심주의의 극복은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3분과 체제의 틀을 해체하는 데서 출발한다. 21세기 역사학을 선도하고 있는 트랜스내셔널 역사(transnational history), 얽혀 있는 역사(entangled history), 지구사(global history), 세계사(world history), 변경사(border history) 등의 새로운 연구 경향은 역사학의 3분과 체제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 안에 내장된 서구 중심주의적 지식-권력 체제를 넘어서는 대안으로 주목된다.
역설적이지만, 21세기 한국의 서양사학 [한국서양사학회]은 보편적 기준으로서의 상상된 서양을 해체하고 서양사를 넘어 역사로 나아갈 때 앞으로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