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김씨(金氏)이며 이름은 한기(漢基). 본관은 김해(金海). 대구광역시 출생. 아버지 김봉산(金奉山)과 어머니 현풍(玄風)곽씨(郭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학과 노장철학(老莊哲學)에 심취하여 상당한 학문적 경지를 구축해 놓았던 그는 1923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보성고보 졸업 후에는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여 전매서장(專賣署長)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미 보성고보 4학년 때 “이제 내가 갈 곳은 부처님 경전밖에 없다.”는 말을 하였다는 그는 이후 불교사상에 몰두하였다.
재가자(在家者)의 신분으로 20대 이후부터 김법린(金法隣)·최범술(崔凡述) 등과 함께 불교청년운동에 가담하였으며, 29세 때는 금오(金烏)·전강(田岡) 선사와 함께 파계사(把溪寺) 성전암(聖殿庵)에서 하안거(夏安居)를 지내다가 깨달음의 경지를 터득하게 되었다.
재가자가 승려들과 함께 안거를 지내는 일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지만, 당시 승단이 그의 수행태도를 높이 평가한 결과였다.
이 때의 깨달음을 계기로 제산(霽山)은 그에게 득장(得杖)이라는 거사의 호를 주었으며, 당시 쌍계사(雙磎寺) 조실이던 설석우(薛石友)는 백룡(白龍)이라는 거사의 호를 주었다.
아울러 적음(寂音)·금봉(錦峰) 등의 당시 대 선승들로부터 그의 뛰어난 선기(禪機)를 인정받게 되었다. 세간과 출세간의 경지를 넘나들던 그는 1950년 11월 15일, 48세라는 늦은 나이로 본격적인 승려생활에 들어섰다.
충청남도 공주마곡사(麻谷寺)에서 제산을 은사로 하여 뒤늦은 출가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금봉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당시의 체험을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남겼다.
“꽃을 찾아 10년 동안 방황했으나, 이제야 눈 앞에 붉은 꽃이 타고 있는 것을 보았네. 산 속의 고요 속에 천지를 여니, 비로자나 법신불이 문밖의 손님일세(探花十年未見花 卽前紅花花灼灼 山門肅靜天地開 毘盧遮那門外客)”.
충청남도 서산 간월암(看月庵)에서 3년간 결사정진하던 그는 1954년 상주 갑장암(甲長庵)에 머물러 있다가 불교정화운동의 대열에 뛰어 들었다.
동산(東山), 효봉(曉峰)의 요청으로 서울로 올라와 청담(靑潭)·경산(慶山)·지효(智曉)·월하(月下)·구산(九山) 등과 함께 종단의 정화운동에 참여하였다.
한때는 조계사 대웅전에서 단식기도를 하다가 상대방에게 피격을 당하여 장기 입원치료를 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종단 정화운동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그는 조계종의 주요 행정보직을 역임하였다. 충청남도와 경상북도 종무원장(宗務院長), 총무원 총무부장 등의 자리를 거쳐 1960년, 1962년, 1983년 세 차례에 걸쳐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다.
또한 1960년 능인학원 이사장, 1967년 동국학원 이사장, 1971년 조계종 종정지도위원장, 1973년 제10차 세계불교도대회 한국 수석대표 등의 주요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특히 종단이 혼란에 빠져있던 1983년에는 8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총무원장직을 맡아 종단의 안정과 화합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바 있다.
한편, 종단의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처무규정(處務規定)』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승단행정에 상당한 편의를 주었다. 1980년 강화 전등사(傳燈寺)의 조실(祖室)로 추대된 이후에는 계속 전등사에 머물렀으며 1982년에는 조계종 원로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입적 얼마 전에 직지사(直指寺)로 거처를 옮겼던 그는 서별당에서 입적하였다. 제자들을 모아 놓고 남긴 그의 임종게(臨終偈)는 다음과 같다.
“형상이 없지만 두드리면 곧 신령스러움이 있고, 삼독으로 화탕지옥에서 한평생을 지냈다. 이제 몸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차가운 달 빈 산이 진리의 몸이로다(無形叩之卽有靈 三毒火湯過平生 脫却體路還本鄕 寒月空山屬眞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