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관원으로 녹사(錄事) 2명과 이속(吏屬)으로 기사(記事) 2명, 기관(記官) 2명, 서자(書者) 2명을 두었다.
1392년(공양왕 4)의 기사에서 주자(鑄字)와 서적의 인쇄를 관장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 이전에도 단순히 인쇄된 서적뿐만 아니라 주자에 관한 일과 서적의 인쇄까지도 관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연혁은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한림원(翰林院)에 병합하였으며, 뒤에 다시 설치하였는데, 그 시기는 1362년(공민왕 11)우문관(右文館)과 진현관(進賢館)이 예문관(藝文館)으로부터 독립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 기관들과 함께 병합되었던 서적점 또한 이 시기에 다시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이것이 1391년 일시 혁파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서적원(書籍院)이라는 이름으로 부활된 점으로 보아 고려 전기간에 걸쳐 존속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서적원은 바로 조선왕조로 직결되어 조선 초기의 융성한 인쇄문화를 형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관부(官府)는 고려·조선 두 왕조에 걸쳐 정규관부와 제사도감각색(諸司都監各色)을 넘나들면서 활약한 것으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