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협회는 1918년 창립되어 1936년까지 존속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단체이다. 휘호회·전람회·의촉 제작·도서인행·강습소 운영 등을 통해 회원의 활동과 후진 교육, 대중 계몽 등을 펼쳤다. 1921년 열린 제1회 서화협회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근대적인 종합 미술전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1921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잡지인 『서화협회보』를 기관지로 발행했다. 후진 양성 기관인 ‘서화학원’을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열었다. 창립 이후 1936년까지 15회의 전시회를 통하여 한국 근대 미술의 발전과 화단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신구서화계(新舊書畵界)의 발전, 동서 미술의 연구, 향학(向學) 후진의 교육 및 공중(公衆)의 고취아상(高趣雅想)의 증장을 목적으로 하였다.
1918년 5월 19일 안중식(安中植), 조석진(趙錫晋), 오세창(吳世昌), 김규진(金圭鎭), 정대유(丁大有), 현채(玄采), 강진희(姜璡熙), 김응원(金應元), 정학수(丁學秀), 강필주(姜弼周), 김돈희(金敦熙), 이도영(李道榮), 고희동(高羲東) 등이 장교동 8번지 건물에 모여 서화협회 발기회를 열었다. 이들은 6월 16일 장교동 사무실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협회 취지서와 규칙을 채택한 뒤 제1대 회장 안중식, 총무 고희동, 간사 김균정(金均禎)을 각각 선출하였다.
서화협회는 휘호회(揮毫會) · 전람회 · 의촉 제작 · 도서인행(圖書印行) · 강습소 운영 등 전시를 통한 회원의 활동과 후진 교육, 대중 계몽 활동 등을 하였다. 창립 1개월 후인 7월 21일 태화정(太和亭)에서 창립기념 제1회 서화휘호회를 가졌다. 1919년 봄에는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를 계획하였으나 3 · 1 운동의 발발로 무기 연기되었다. 그 해 11월 2일 제1대 회장이었던 안중식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조석진이 2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회장 추대 과정에서 회원들 사이에 분열이 야기되어 김규진과 노원상(盧元相), 이규원(李圭元), 홍순승(洪淳昇), 윤기선(尹箕善), 이병직(李秉直), 유정환(兪正煥) 등이 협회를 탈퇴하였다.
잠시의 공백기가 있은 뒤 1921년 2월 3대 회장에 정대유를 선출하고 4월 1일부터 3일까지 그동안 실시하지 못했던 제1회 서화협회전을 중앙중학교 강당에서 열었다. 회원들의 그림과 글씨 그리고 고서화를 포함하여 100여 점이 전시된 제1회 서화협회전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열리는 근대적인 종합 미술전이었기 때문에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 이어서 4월 30일 제2회 정기 총회를 열고 제4대 회장에 김돈희를 선출하였다. 그리고 10월에는 협회 기관지로서 『서화협회보』를 발행하였다. 이 잡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잡지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그러나 이 잡지는 1922년 3월 제2호를 끝으로 더 이상 발간되지 않았다.
한편 서화협회전은 1회전 이후 해마다 개최되었으나 1922년 조선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됨으로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화협회 회원들 대부분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서화협회전은 점차 위축되었고 성격이 불분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6년까지 15회의 전시회를 통하여 한국 근대 미술의 발전과 화단의 활성화에 기여한 점은 크게 평가된다.
이밖에도 협회 창립 때부터 주요 사업의 하나로 목표했던 후진 양성 기관인 강습소를 1923년 서화학원(書畵學院)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서화학원은 동숭동에 건물을 두고 동양화 · 서양화 · 서(書)의 3부로 나누어 학생을 모집하였다. 강사는 김돈희, 이도영, 고희동이었으나 응모 학생이 많지 않았다. 또 재정난으로 인하여 개설한 지 2년만인 1925년 문을 닫았다. 서화협회는 미술 문화의 근대화와 활성화를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민족 미술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성숙시키지 못한 채 1936년 제15회 서화협회전을 마지막으로 그 활동을 중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