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2년(세조 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6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469년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하기 위해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구치관(具致寬)의 종사관이 되어 변경을 돌보았다. 같은 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어 형들과 함께 전라도 영암 · 광주 지방에서 일어난 도적의 무리를 소탕하는 대책을 제시하였다.
1476년(성종 7) 사헌부지평으로 당시의 권신 한명회(韓明澮)의 권력 남용을 탄핵, 결국 체직시켰다. 그 뒤 홍문관교리 · 성균관직강을 거쳤다. 1479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언관(言官)의 우대와 언론의 보장을 주장, 성종의 동의를 받았다.
이어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으로 궁중의 살림을 주관했고, 1482년 사헌부집의를 거쳐 홍문관전한이 되었다. 이 때부터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함께 경연에 참여, 내수사 장리(長利)의 폐단을 지적하고 수령의 인사 관리를 엄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 · 좌부승지 · 우승지 · 좌승지를 역임하고 1486년 도승지에 올랐다. 이듬해 경기관찰사가 되어 연해 도서지방에 둔전을 설치하고, 곧 내직으로 옮겨 예조참판 ·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이듬해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89년 공조판서에 올랐다.
이어서 도순찰사가 되어 해안 방어를 점검하고 조창 이전 문제를 검토, 부분적으로 실시하였다. 그 뒤 형조판서 · 우참찬 · 예조판서 ·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특히, 성종의 신임이 두터웠는데 사람들은 일찍이 종친 계성군(桂城君)이 성건의 집에서 자라 국왕과 왕대비가 비호한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