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창은 조선시대 북한강 수계 지역에 위치했던 유일한 조창이다. 북한강은 금강산(金剛山)에서 발원한 금강천이 남쪽으로 흐르면서 화천에 이른다. 강원도 화천에서 양구쪽으로 흐르는 천은 파로호(破虜湖)를 이룬 후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강원도 춘천에서 소양강과 합류한다. 한편 강원도 인제에서 발원한 소양강은 남서쪽으로 흐르다 춘천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이후 북한강은 서남쪽으로 흐르다 경기도 양평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하여 한강이 된다. 소양강창은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지점인 춘천에 위치하고 있어 강원도 영서 북부 지역의 세곡을 수로를 통해 한강까지 쉽게 운반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소양강창의 설치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소양강창이 기재되지 않았고, 1469년(예종 1)에 비로소 소양강창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15세기 중엽 처음 설치된 것이 아닌가 한다. 소양강창은 춘천 관아의 북쪽 5리 지점인 현재의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춘천과 홍천, 인제, 양구, 낭천 등 5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조운을 통해 서울의 경창으로 운반하였다.
조선 전기 강(江)을 이용한 조운은 수운(水運)이라 하는데, 한강과 예성강을 두고 좌도수운(左道水運)과 우도수운(右道水運)으로 구분하였다. 소양강창은 한강의 지류인 북한강에 있었으므로 좌도수운 즉, 좌수참에 포함되어 좌도수운판관(左道水運判官)의 관리를 받았다. 좌수참에는 소양강창 이외에 충주 가흥창, 원주 흥원창 등의 조창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소양강창을 비롯한 좌도수운의 조창은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특히 세곡의 관선(官船) 조운 대신에 민간 선박에 의한 임운(賃運)의 방식이 확대되고, 몇몇 지역에서는 세곡의 납부가 면포나 동전의 납부로 대체되면서 소양강창은 더 이상 조창의 기능을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소양강창은 적어도 18세기 초반까지는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중엽을 살았던 유형원이 『반계수록』에서 당시 운영하고 있는 조창 중 하나로 소양강창을 적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1701년(숙종 27) 춘천부의 세곡을 실은 선박이 경내 강변에서 침몰한 사고가 있었던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소양강창이 기능하지 않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미 그 이전에 조창의 기능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18세기 후반 호조에서 편찬한 『탁지지(度支志)』에서도 소양강창은 이미 폐지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소양강창은 18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양강창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전국 9개 조창 중 하나로 수록된 조창으로, 북한강 수계에서 조선 전기에 운영되었던 유일한 조창이었다. 소양강창은 좌수참 소속의 조창으로, 강원도 영서 북부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소양강창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조창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폐지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 세조 대부터 약 300년간 북한강 수계에 설치되었던 유일한 조창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