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이명은 송헌주(宋憲柱)·송헌수(宋憲樹)·송헌위(宋憲尉)이다.
왕립영어학교(王立英語學校)를 졸업했다. 1904년 경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상조회(韓人相助會) 회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버지니아 주 로어노크(Roanoke) 대학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해 통역관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9년에는 미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 6월 이승만(李承晩)에 의해 하와이에 파견되어 외교와 대내선전 업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애국공채를 발매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였다.
1922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가 대의회(代議會) 결의로 지방총회를 폐지하자 미주(美洲)·멕시코·쿠바에 있던 지방회(地方會)들만으로 국민회를 재편성하고 북미대한인국민회를 발족시켰다.
1936년 5월에는 활동이 부진한 북미대한인국민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1939년 1월 총회장에 선임되었다.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에서 재미한족위원회 설립 집행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1년 12월 임시정부에서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했을 때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내에 국방과(國防課)를 신설했다. 그리고 한인국방군(韓人國防軍) 편성계획을 미 육군 사령부에 제출해 허가를 얻어내어 캘리포니아 주 경위군(警衛軍) 내 한인중대 창설에 착수했다. 이어 지원병을 모집하여 1차 응모자 50여 명을 캘리포니아 주 경위군에 인계했다.
한인 경위대는 맹호군(猛虎軍)이라고도 불렸으며 매주 한 번씩 훈련을 받았다. 계속된 모병활동으로 100여 명 이상의 병력을 확보한 뒤 경위군 사관에 임명되어 외교과(外交科) 정위를 맡아보았다.
1942년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기획연구부에서 『한국과 태평양전쟁』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1944년 10월 재미 한인단체들이 모여 주미외교위원부 개조안을 마련했다. 이듬해 3월에는 연합국회의(聯合國會議)에 참가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미주 대표 9명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1945년 4월 57개국 대표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국제연합(國際聯合)을 조직하려 할 때, 한국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대표회의를 열고 한족대표단을 구성하여 국제연합 결성대회에 파견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