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5월 당시 임시정부의 안동교통지부 사무국은 안동현 구시가 흥륭가(興隆街)이륭양행(怡隆洋行) 2층에 있었다.
이륭양행은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 사람 쇼가 경영하던 무역회사 겸 중국의 태고선복공사(太古船輻公司) 대리점이었다.
쇼는 사무국 사무실을 빌려주는 한편, 독립운동자를 숨겨주고 상해로 오가는 선편을 제공하고, 자기 이름으로 우편물의 왕래를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무기수입의 편의까지 제공하고 있었다.
이륭양행은 안동 구시가지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영사관 경찰권이 미치지 못하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쇼는 아일랜드인으로 그의 고국이 영국의 식민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처지나 독립운동가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일제는 1920년 7월 14일의 이른바 오학수(吳學洙) 사건을 계기로 신의주에서 그를 검거하였다. 이는 영국과 일본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하여 그 해 11월 19일 보석으로 풀려났고, 1924년 3월 7일 공소가 취하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