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비구니계의 3대 강백 가운데 한 인물이다. 경상남도 진해 출생. 속성은 정(鄭)씨이며 본관은 동래(東萊). 당호는 화산(華山). 아버지는 태익(泰翼), 어머니는 어(魚)씨이다.
17세가 되던 1918년 6월 13일수덕사(修德寺)에서 비구니 법희(法喜)를 은사로, 비구 청월(淸月)을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니계를 받고 출가하였다. 이후 1920년 해인사 불교전문강원으로 들어가 고경(古境)의 문하에서 사집과를 수료하였으며, 서울 서대문응선암(應禪庵)에서 대은(大隱)을 강사로 수학하다가 1929년 사교과와 대교과를 수료하였다. 같은 해 4월 해인사에서 용성(龍城)을 계사로 비구니계와 보살계를 받았으며, 그때부터 5년간 수덕사 견성암에서 참선수행에 전념하였다.
해외유학에 뜻을 두었던 그는 1934년 3월 일본 경도(京都) 묘심사파(妙心寺派)의 종립학교인 미노니중학림(美濃尼衆學林)에 입학하여 1937년 3월 전문과정을 수료하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상주남장사(南長寺) 불교전문강원의 강사로 취임하여 3년간 학인들을 지도하였고, 이후 7년 동안 다시 수덕사 견성암에서 참선 수행하였다.
1947년 3월에는 서울보문사(普門寺)의 불교강원 강사로 취임하여 3년간 후학을 가르쳤으며, 1951년부터 4년간 충청남도 예산군보덕사(報德寺) 주지를 지냈다. 1955년경상남도 양산시 천성산 내원사(內院寺) 주지로 취임하여 이후 6·25로 황폐해진 이 사찰을 크게 중창하였다.
1955년부터 4대에 걸쳐 조계종 종회의원을 역임하면서 종단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선·교·율을 두루 겸비한 고승으로 추앙받던 그는 속세 나이 65세, 법랍 47년으로 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그가 지은 한시가 이종익(李鍾益) 번역의 『화산집(華山集)』에 전한다.
내원사 중창의 공로를 인정받아 1959년 경상남도지사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1962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수여하는 문화재 보호 공로상과 문화훈장을, 1964년에는 조계종 종정이 수여하는 공로상을 각각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