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리 한실마을 앞 보성강 건너편의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로 이 지역에서는 지표조사시 산록의 경사면에서 3개군 27기, 그리고 평지의 논에서 3기 등 모두 30기의 고인돌과 조선시대 백자요지가 발견되었다.
그 중 백자요지가 지난 1986년과 1987년 2차에 걸쳐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이 백자요지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순천시 송광면 후곡리에 위치한다. 이 곳은 순천시의 서남부에 소재한 높이 918.8m의 모후산(母後山) 동남편으로, 모후산과 연결되어 뻗어내린 야산의 맥이 동쪽에 있는 보성강 연안까지 내려오는 지형의 가운데 골짜기에 해당된다.
가마[窯]가 위치한 지역은 이러한 지형조건과 함께 사질토와 석비레층이 형성된 토층이 존재해 도자기가마 축조에 필요한 최상의 토질을 갖추고 있으며,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고령토의 맥이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후곡리요지는 원료공급도 용이하며 수로를 이용한 운송도 편리한 지점으로 도자기가마 설치에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가마는 석비레층을 파내어 요상(窯床)을 만들고 양벽은 진흙으로 축조해 지상에 올린 터널식 등요이다. 소성실은 3개의 방으로 이루어지고 각 방은 불창살로 연결되고 있으며 화당(火堂)인 봉통은 반지하식의 진흙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1실(一室)의 터널식 등요에서 계단식 연실등요(連室登窯)로 이행되는 단계의 형식, 또는 1실의 터널식 요를 백자소성에 적합한 구조로 변형시킨 형식이다. 이러한 구조는 조선 초기부터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조선백자 지방요의 기본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된 백자의 기종은 바리[鉢]·접시·대접·뚜껑[蓋]·단지[壺] 등이 주종을 이루며, 병(甁)·장군·떡살 등도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일상용기이다. 대부분이 문양이 없는 것들이나, 약간의 접시·대접에서는 철회(鐵繪)기법도 보인다. 굽는 방법은 갑발을 사용하지 않고 요상에 도짐을 놓고 그 위에 기물을 그대로 놓은 나번(裸蕃)으로 이루어진다.
전체적인 양상을 통해볼 때, 후곡리 요는 갑발을 사용한 고급품은 전혀 굽지 않고 나번으로 물건을 포개어 소성한 대량생산체제의 민수용(民需用) 가마이다. 또한 이는 중국 명대(明代) 백자의 영향을 받은 예리한 수직굽, 가는 모래받침, 정제된 기형의 특징을 지닌 백자와는 다르다. 특성상 오목굽에 바탕흙을 빚어 받치는 전통성이 강한 굽형식, 간략한 초문(草文) 형태의 활달한 필치인 철회문양 등이 보여 분청사기의 전통이 계승된 도자기라 할 수 있다.
이 후곡리 가마는 절대연대를 추정할 만한 근거는 없지만, 전반적인 특징요소로 미루어 보아 17세기경이 중심연대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