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석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신기석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신기석 전후면
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근대외교사』 · 『한말외교사연구』 · 『신고동양외교사』 등을 저술한 학자. 정치인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지양(芝陽), 岩田基碩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8년 5월 6일
사망 연도
1989년 2월 2일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
정의
일제강점기 『근대외교사』 · 『한말외교사연구』 · 『신고동양외교사』 등을 저술한 학자. 정치인 ·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08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출생했다. 1919년 보통학교 졸업반 학생으로 3·1운동에 참가했다. 1927년 3월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9월 보통학교 제2종 교원시험에 합격해 안동공립보통학교 촉탁교원으로 근무했다. 1928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 1930년 3월 수료했다. 같은해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에 입학해 1933년 3월 졸업했다. 대학 재학 시인 1931년 10월 경성제국대학 반제동맹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경성제대 법문학부 국제법외교사연구실 조수로 근무했고, 1935년 7월 경성제대 만몽문제연구소의 일원으로 만주를 시찰한 후 그 기행문인 『유만잡기』를 같은 해 8월 발표했다.

1937년 5월 만주국 산업부 속관에 임명되었고, 1938년 3월 대동학원(大同學院)을 졸업했다. 같은해 10월 만주국 산업부 척정사(拓政司) 고등관시보에 임명되었으며, 1939년 1월에 산업부 개척총국 초간처(招墾處) 고등관시보로 전임되었다. 1939년 4월 만주국 고등관특별적격고시에 합격해 같은해 10월 천임관(天任官) 3등의 사무관으로 승진했고, 1939년말에는 만주국협화회 수도계림분회 상무원 겸 선덕달정부장(善德達情部長)으로 활동했다. 1940년 7월 관제개정에 따라 흥농부 개척총국 초간처 사무관으로 근무하면서 같은해 8월 만주국협화회 수도계림분회에서 조직한 재만조선인교육후원회의 간사, 9월에는 만주국협화회 수도계림분회의 상무원 겸 총무부장이 되었다. 1945년 5월 천임관 2등의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흥농부 농산사 이사관에 임명되어 수도과장(水稻課長)으로 해방될 때까지 근무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1946년 5월 경성대학교 법문학부 교수에 임용된 이래 연희대학교,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중앙대학교, 경희대학교의 교수를 지냈으며, 1961년 5월부터 1963년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무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냈다. 이후 부산대학교 총장, 영남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1973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89년 2월 2일 사망했다.

신기석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6·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8: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904∼927)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상훈과 추모

학술원 공로상(1968), 국민훈장 모란장(1972)을 받았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8: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팔십평생』(탐구당, 1987)
『대한민국건국10년지』
『만주국관리록』
『역대국회의원총람』
『조선총독부관보』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조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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