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 53기인 신응균의 아버지이다. 1905년 대한제국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한 뒤 1906년 육군무관학교로 진학했다. 1909년 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 중앙유년학교 예과 3학년에 편입, 1911년 본과에 진학해 1912년 5월 졸업했다. 같은 해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 1914년 제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으로는 이응준(李應俊) · 홍사익(洪思翊) · 김준원(金埈元) · 이대영(李大永) · 유승렬(劉升烈) · 박승훈(朴勝勳) · 이청천(李靑天) · 안병범(安秉範) 등이 있다.
1918년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 시 참전했으며, 1926년부터 1934년까지 일제조선군 제19사단에 소속되어 함흥에서 근무했고, 1934년부터는 제20사단에 소속되어 대구로 전속되어 대구중학교에서 군사교련을 담당했다. 1935년 만주사변 논공행상 시 욱일장(旭日章) 4등을 수여받았다. 1933년 소좌, 1938년 중좌로 진급했다. 1942년 7월에는 용산정차장 사령관으로서 병참 보급과 관련한 일을 수행했다. 1944년 4월부터는 예비역 중좌로 해주 육군병사부에서 근무했다.
해방 이후 육해공군출신동지회(회장 김석원) 총무부장 · 독립촉성국민회청년단 초대 문교부장 등을 맡아 활동하던 신태영은 1948년 9월 27일 국방부 참모총장 보좌관에 취임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군의 주요 간부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대령 진급과 함께 육군본부 초대 행정참모부장 겸 국방부 제1국장이 되었고, 1949년 10월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육군참모총장대리가 되었으나 1950년 4월 퇴역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복귀하여 전라북도 편성관구사령관이 되었다. 1952년 1월 중장으로 승진했고, 3월부터는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1952년부터 1953년까지 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54년 현역으로 복귀하여 민병대 총사령관을 지냈다. 1959년 4월 8일 사망했다.
신태영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0·11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02∼31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