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해방 이후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태껸 전승자로 지정된 기능보유자.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특히 택견을 잘하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맞서기[겨루기]를 시켜 우승자에게는 푸짐한 상을 주는 한편, 술과 고기를 나누어 먹으며 그들과 재담을 즐겼다. 이러한 종조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택견을 배우고 호연지기를 키울 수 있었다.
그 뒤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옮겨가 이민생활을 하면서 1944년 사평(四平) 산성진국민고등학교(山城鎭國民高等學校)를 졸업하였다. 1949년 신흥대학(新興大學: 현 경희대학교) 체육과에 입학하여 1951년 수료하기까지 레슬링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뒤 충주로 내려와 유도에 몰두하기도 하였으나, 1961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자 어렸을 때 보고 익혔던 택견의 원형을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택견의 명인들을 찾았다. 드디어 1970년 송덕기(宋德基)를 만나 택견에 관한 기술을 전수받는 한편, 택견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1973년 10월 충주에 택견 전수도장을 세우고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택견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81년 11월 그 동안 정리한 택견 관계 자료를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에 제출하여 인멸될 위기에 있는 택견을 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1983년 6월 1일 택견이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으며,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았는데, 이는 무술 분야의 유일한 지정유산인 셈이다. 그 뒤에도 택견의 보급과 후진 양성에 진력하여 1984년 제2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식후 공개 행사로 택견을 발표하였고, 1987년에는 택견전수생 이수자격 평가 공개발표회도 가졌다.
한편, 택견과 운동의 원리는 비슷하다고 하여 구전되고 있는 전통무예 수벽치기를 복원하려고 노력하였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뿌리로 한 선비정신인 ‘참’을 찾아야 된다고 역설한 그는, 근세 택견의 마지막 전승자이며 현대 택견 중흥의 중시조로서 택견 정립의 외길에 평생을 바친 무도인이다.
참고문헌
- 『택견』(송덕기, 서림문화사, 1983)
- 『발굴 한국현대사인물』 3(한겨레신문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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