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으로 각 10책의 정본(正本)과 부본(副本)이 있다. 정확한 편자는 알 수 없으나 세자를 수행한 시강원에서 등록(謄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작성된 배경은 ≪심양일기 瀋陽日記≫와 같다.
이 책의 정본은 각 책의 크기가 다르며 필체·행수도 일정하지 않고 행서 또는 초서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반복해 실린 것이나 날짜의 순서가 바뀐 것도 있고 훼손되어 문자가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이에 비해 부본은 정본을 정리한 것으로 알아보기가 쉽다. 필체와 규격이 일정하고 오자·탈자, 반복된 것, 뒤바뀐 것을 모두 정리해 실었으며 문자도 해서체로 모두 바꾸어 썼다.
정리된 체재의 부본을 대상으로 내용을 소개하면 1637년(인조 15) 2월 19일의 것을 시작으로 1643년 12월 15일까지의 장계가 수록되어 있다. 1책부터 4책까지는 1637년 이후 각 1년씩의 내용을 싣고, 5·6책은 1641년, 7·8책은 1642년, 9·10책은 1643년의 장계를 수록하였다.
소현세자가 청에 머물러 있던 마지막 해인 1644년의 장계와, 세자가 청의 태종을 따라 심양관을 떠나 있던 1639년 10월 이후부터 다음해 2월까지의 것은 실려 있지 않은데, 이 시기의 상황은 ≪심양일기≫ 등을 자료로 보완할 수 있다.
수록된 장계는 대부분 시강원의 재신(宰臣)이 승정원에 올린 것이다. 그 내용은 세자 대군 이하 수행 신하의 동정, 청과의 교섭에 대한 보고를 올리고 처분을 구한 것, 명과의 관계에 대해 탐문한 것 등이다.
하루에 여러 통을 보내거나 비밀 사항을 상세히 기술한 것도 있다. 이 밖에 간혹 앞머리에 ‘시강원개탁(侍講院開坼)’이라고 기재된 장계가 있다. 이것은 세자가 청의 출정에 종군하거나 사냥하러 떠났을 때 심양관에 남아 있던 관원이 세자를 수행한 시강원 재신 앞으로 보낸 것이다.
≪심양일기≫ 등과 더불어 명·청 교체기 조선의 외교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청초 황실의 후계자 및 왕족들에 대한 심양의 상태와 청군의 동향, 명이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던 조선 가도(椵島)의 상황이나 조선과 청의 명 정벌을 비롯한 명과의 관계, 청에 잡혀간 조선인의 송환, 심양 및 의주에서의 담배·종이 등의 교역과 같은 사실들에 대해서 풍부한 자료를 전하고 있다.
한편, 풍부한 이두 자료를 전하고 있어 국어학의 연구 자료로도 중시된다. 이 책은 조선이 침략당했던 사실들을 강조하면서 이른바 만선사(滿鮮史)의 관점을 세우고 있던 일제 식민주의사관의 사학자들에게 이른 시기부터 주목되었다.
그리하여 1935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法文學部)에서는 중복되는 내용을 정리하고 이두를 구분해 표시하는 등 간단한 편집과 해제를 붙여 규장각총서 제1권으로 간행하였다. 1988년에 한강사(漢江社)에서 이것을 영인하였다. 규장각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