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6책(5·6권 1책, 9·10권 1책 결). 필사본. ‘청장관고(靑莊館稿)’라고도 한다. 저자 자신이 시문 각체 가운데에서 선집한 것이다.
이덕무가 죽은 뒤에 왕명에 의하여 ≪아정유고≫(8권4책)가 간행되었다. 이 간본은 필사본에서 간추려 만든 것이므로 편차와 분량이 다르다. 본 필사본은 권1∼4에 시 600여 수, 권7·8에 서(書) 385편, 권11에 서 47편, 권12에 응지각체(應旨各體) 시 13수, 서(序) 1편, 전(傳) 2편, 책(策) 1편, 춘첩(春帖) 1편, 주련(柱聯) 16구 등이 실려 있다.
저자의 여러 저작 가운데에서 저자 자신이 골라 뽑아놓은 책이다. 저자의 시문에서 정수만 모아놓은 것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이덕무의 아들인 광규(光葵)가 이덕무의 방대하고 해박한 저작을 모두 망라하여 ≪청장관전서≫를 편집하였기 때문에 이 책에 가려서 ≪아정유고≫는 그 가치를 크게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정유고≫에서는 전서에 나타난 실학적 사고 이외에도 그의 뛰어난 문학적 재질과 기량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시는 편수도 많고 내용도 다양하여 그 특징을 개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사대부로서의 삶의 전반적인 모습을 시로 담고 있다.
청나라 이조원(李調元)이 일찍이 이덕무의 시에 대하여 “조구(造句)가 견실하고 노련하며, 풍격이 혼연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마음 내키는 대로 배열하여도 속태(俗態)가 나지 않는다. 사가(四家: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가운데 가장 노련한 솜씨로 추어 올려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덕무의 시 가운데에서 <추일숙심계추월헌 秋日宿心溪秋月軒>이라는 시가 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에게 격상을 받았다.
이 밖에도 <단양집일관헌시 端陽集日觀軒詩>·<추등우급 秋燈雨急>·<만서육언 謾書六言>·<추만불매 秋晩不買>·<대동강범주 大同江泛舟>·<전사 田舍>·<만월대별박연암백영숙지김천 滿月臺別朴燕巖白永叔之金泉>·<용인도중 龍仁途中>·<양두섬섬 兩頭纖纖> 등의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서는 족질 광석(光錫)에게 부친 것을 비롯하여 박종산(朴宗山)·윤가기(尹可基)·성대중(成大中)·유득공 등 친지와 동학들에게 보낸 것이 있고, 이조원·이정원(李鼎元)·반정균(潘庭筠) 등 중국인사에게 보낸 것도 있다.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광석에게 보낸 편지가 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 가운데는 문학에 대하여 깊이 있게 논의한 대목도 있으며, 중국문인들과 우리나라의 문인, 문학에 대하여 논한 것도 많다.
<응지각체>는 임금의 명에 의하여 지은 여러 형식의 시를 모아놓은 것이다. 전 가운데 <은애전 銀愛傳>은 김은애가 모함을 한 노파를 살해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것을 무죄로 방면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김신부부전 金申夫婦傳>은 정조가 명을 내려 당시 28세의 노총각 김희집(金禧集)과 21세의 노처녀 신씨의 혼인을 맺어준 이야기를 서술한 내용이다. 간본 ≪아정유고≫에는 필사본 ≪아정유고≫의 결본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서(序)·기(記)·<송유민전 宋遺民傳> 등의 저작이 더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