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왕(忠肅王)이 잠저(潛邸: 임금이 보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렀던 사저. 통상 왕의 즉위 이전을 지칭)에 있을 때 시학(侍學)으로 있었는데, 집안이 미천하고 재주는 없었지만 성품이 유연하고 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왕의 총애를 받았다.
1314년(충숙왕 1) 선부산랑(選部散郎)이 되었으며 1320년 정방(政房)이 설치되자 대언(代言)으로서 전주(銓注: 인사업무)를 관장하였고, 1321년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의 문제로 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扈從)하였다.
133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고려시대 과거시험관) 채홍철(蔡洪哲)을 도와 남궁민(南宮敏) 등 33인을 급제시켰는데, 이때 폐신 양재(梁載)의 청을 들어 이윤(李潤)을 급제시켰으므로 왕이 옥대(玉帶)와 오종포(五綜布) 600필을 내려주었다. 뒤에 연평군(延平君)에 봉해지고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