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릉은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고남리 용수산 남록에 있는 고려 전기 제3대 정종과 왕비 문공왕후 박씨가 묻힌 왕릉이다. 정종은 949년 3월 제석원에서 승하하여 송악산 동쪽 안릉에 묻혔는데 이 능은 북한 보존급유적 제5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능제는 고려왕릉의 전형적인 3단이고, 병풍석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고 12각 난간석을 둘러치고 그 주위로 사자석이 배치되어 있다. 1978년 발굴 결과 무덤 칸에는 4벽과 천정에 별자리 등의 벽화가 있고, 바닥에는 왕과 왕후의 관대가 놓여 있고 청자나 금동자물쇠 등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고려 제3대 임금 정종(定宗)은 고려 태조의 차남으로, 945년(혜종 2) 혜종(惠宗)의 사후 왕위에 올랐다. 왕식렴(王式廉)의 도움을 받아 왕규(王規)의 반란을 평정하고 호족(豪族)들을 제어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개경의 호족들을 피해 서경(西京)으로 천도(遷都)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정종은 949년(정종 4) 3월 병진일에 제석원(帝釋院)에서 병으로 승하하여 안릉(安陵)에 장례 지냈다. 이후 정종의 제1왕비인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朴氏)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후 정종의 안릉에 합장되었다. 안릉은 북한 개성특급시 개풍군 고남리에 위치해 있다.
안릉은 현재 북한의 보존급유적 제552호로 지정되어, 약 900㎡의 영역이 보존 및 보호 구역으로 관리되고 있다. 능역은 일반적인 고려 왕릉과 마찬가지로 동서로 긴 직사각형의 3단이다. 1963년에 조사했을 당시까지 3단을 구분하는 석축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자연적인 피해와 함께 고남협동농장에서 과수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생긴 인위적인 파괴로 인하여 3단 아래쪽의 석축은 사라졌다. 현재 1단과 2단의 석축만 남아 있고 3단 아래쪽 경사면은 옥수수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제1단에 있는 봉분(封墳)은 정남향이며, 원래 심하게 퇴락되어 봉분에 곡장(曲墻)을 쌓았으나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1995년 개성시 문화유적관리소에서 유지 보수 공사를 대규모로 진행하면서 병풍석(屛風石) 중에서 없어진 것을 정비하고 보충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병풍석은 12각이었으나 이 시기의 보수 공사를 통하여 두리뭉실하게 바뀌어, 현재는 본래의 구조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봉분의 높이는 3.8m이고, 직경은 11.5m이다. 병풍석의 외곽으로 일정 간격을 두고 난간석(欄干石)은 모를 죽인 방형의 돌을 가공하여 만든 기둥을 병풍석을 따라 12각으로 돌리고 그 사이에 난간 가로대를 걸쳐 놓아 이루어졌다. 현재 난간 가로대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난간 기둥은 석주(石柱) 10개 중 5개가 남아 있고, 동자(童子) 석주 또한 10개 중 3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 난간 석주의 높이는 대개 1.58m 전후의 크기이고, 동자 석주는 63㎝ 정도의 크기이다. 난간 석주는 끝이 뾰족한 연봉으로 장식되어 있고, 동자 석주는 네모기둥이다.
병풍석의 면석과 모서리 돌은 대충 다듬은 화강석을 썼는데, 무덤의 출입문이 있는 남쪽의 면석에만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자그마하게 돋을새김되어 있다. 봉분 주위의 석수(石獸)는 1963년 조사 당시에는 비록 제자리를 잃고 있었지만 모두 4기가 남아 있었으며, 그중 서쪽 석수 1기는 윗부분만 노출된 상태였다. 그러나 현재는 석사자(石獅子) 3구가 남아 있는데, 모두 자기 위치가 아닌 곳에 세워져 있다. 아마도 과수원을 조성할 때에 생긴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석사자는 봉분을 등지고 바깥을 향해 앉아 있는 모양을 취하고 있다. 사자는 목 아래에 방울이, 꼬리 끝은 등쪽에서 활짝 퍼져 있어 통일신라시대 사자의 여운이 남아 있다. 석사자의 앉은키는 112㎝ 정도이고, 얼굴 부분의 너비는 91.5∼92㎝ 정도이며, 아래 부분의 일부는 흙에 묻혀 있는 상태이다. 그밖에 상석(床石)을 비롯하여 망주석(望柱石)은 발견되지 않았다. 1963년 조사 당시에는 문인석(文人石) 1기가 넘어져 있었는데, 과수원을 조성하면서 없어졌다. 또한 당시 정자각(丁字閣)터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이 또한 없어졌다.
1978년 7월 28일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안릉을 발굴한 결과 남북 길이 347㎝, 동서 길이 240㎝ 의 방형(方形) 무덤 칸을 발굴하였다. 무덤의 천정은 한 단의 평행 고임천정이고 두께 40㎝의 긴 돌로 한 단을 고이고 3매의 천정돌로 덮었다. 돌을 세워 만든 벽면에는 회를 바르고 동서남북 네 벽면과 천정에 벽화를 그린 것이 확인된다. 회가 거의 떨어져 나갔지만 동벽의 푸른 대나무와 남벽의 건물 천정에 붉은색 남두육성(南斗六星)이 확인된다. 무덤 칸에는 왕과 왕후(王后)의 관대(棺臺)가 받침돌 없이 마련되어 있고 그 옆에 부장대(副葬臺)가 마련되어 있었다. 여러 차례 도굴된 흔적이 있으나 금은(金銀) 부스러기를 비롯하여 ‘청자 꽃무늬 바리’와 ‘청자 잔대’, ‘그릇 뚜껑’ 및 ‘금동자물쇠’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정종 안릉은 949년에 처음 조성된 이후 원래의 능역에 조성되어 능제(陵制)와 무덤 칸의 구조 및 상설의 규모까지 상존하여 혜종 순릉(順陵)과 더불어 고려 초기 왕릉의 양식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무덤 칸에서 출토된 청자 유물을 통해 초기 청자를 연구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게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