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아머리와 다리가 한가지로 곧게 뻗은 것은 외다리방아라 부른다.
디딜방아는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이고 태평양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지역인,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인도·코카서스·우크라이나·가르시아·폴란드·헝가리·이탈리아·스위스·독일 등지에서도 널리 쓰였다.
우리 나라의 디딜방아와 기타 지역의 것 사이에는 형태상 큰 차이가 있다. 우리 것은 대체로 양다리방아이나 다른 나라의 것은 모두 외다리방아로서 양다리방아는 우리의 발명품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중국에서 디딜방아가 들어온 초기에는 중국식에 따라 외다리방아를 썼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랜 증거는 황해도 안악에서 발견된 고구려 무덤의 벽화인데, 이 그림의 방아가 외다리방아이다. 방앗간에서 한 사람은 외다리방아를 찧고 다른 한 사람은 찧은 곡식을 고르기 위하여 키에 담아 까부르는 장면이다.
이 무덤에서 347년이라는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고구려에서는 4세기 무렵에 외다리방아를 널리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디딜방아는 후한시대의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흙으로 빚은 모형인데, 역시 외다리방아이다. 이 밖에 여러 곳에서 출토된 유물도 모두 외다리방아이며 1313년에 간행된 ≪농서 農書≫나 1637년에 나온 ≪천공개물 天工開物≫, 그리고 1639년에 나온 ≪농정전서 農政全書≫에 등장한 것들도 예외없이 외다리방아이다.
우리 나라의 서호수(徐浩修)도 그의 ≪해동농서 海東農書≫에서 중국 방아는 외다리여서 한 사람이 찧으나 우리 것은 양다리인 까닭에 두 사람이 쓴다고 적었다. 박지원(朴趾源)도 ≪과농소초≫에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한편, 일본 방아도 모두 외다리방아이며, 미얀마·타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일대와 코카서스지방의 것도 모두 외다리방아이다.
중국의 외다리방아가 우리 나라에서 언제쯤 양다리방아로 바뀌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서기 日本書紀≫에 따르면 고구려 중 담징(曇徵)이 610년에 맷돌을 비롯한 방아류를 만들어 주었다고 하였다.
일본의 방아가 외다리방아인 것으로 미루어 고구려에서는 7세기 무렵까지 외다리방아를 주로 썼던 것으로 보이며 양다리방아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널리 퍼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박지원은 그의 ≪과농소초≫에서 중국의 외다리방아의 좋은 점을 역설하는 나머지 우리 나라의 양다리방아는 결점투성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나무가 반드시 가위처럼 가랑이지고 좌우의 균형도 맞아야 하니 이러한 나무는 천에 하나도 구하기 어렵다. 둘째, 가랑이 목에 구멍을 파서 쌀개를 꿰고 이를 좌우에 세운 볼씨에 얹으니 방아가 움직일 때마다 볼씨도 따라 움직이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
셋째, 방아몸이 볼씨 좌우에 걸쳐 있어 볼씨가 움직이면 쌀개가 흔들거리고 이에 따라 방아머리도 흔들린다. 넷째, 두 사람이 디뎌야 하므로 몸무게가 서로 다르면 쌀개는 비뚤어지고 공이는 확 주변을 때리게 마련이다.
다섯째, 한 사람이 확 옆에 붙어앉아서 곡식을 쓸어넣지 않으면 낟알이 전부 밖으로 튀어나온다. 여섯째, 방아머리가 가벼워서 돌을 잡아매는 경우 이것이 떨어져 낟알을 쓸어넣는 사람이 다칠 염려가 있다. 일곱째, 한 집에 최소한 세 사람이 있어야 방아를 찧을 수 있으니 바쁜 시절에는 세 사람이 모이기 어렵다. 여덟째, 방아고가 돌이 아닌 나무인 데다가 확 자리와 발 디디는 곳의 높낮이에 차이가 없으니 비능률적이다. 아홉째, 확을 평평하게 묻는 까닭에 고가 떨어지면 낟알이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농가의 가장 중요한 연장의 하나인 디딜방아에 대해서, 그것도 우리 나라의 것과 중국의 것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장단점을 찾아낸 사람이, 그 이전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없었던 사실 하나만으로도 박지원의 공적은 오래 기억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방아에 대한 그의 의견은 중국의 것을 높이 보고 우리 것을 뒤떨어진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출발한 까닭에 잘못된 점이 적지 않다.
첫째, 양다리방아는 외다리방아보다 능률이 높다. 중국에서 외다리방아만을 썼던 것은 물방아·물레방아·연자매 따위가 널리 보급되어 양다리방아에 대한 필요성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디딜방아가 없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또, 일본에서도 디딜방아는 떡을 치거나 삶은 콩을 찧는 데에만 썼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곡물을 찧거나 빻는 일을 대체로 디딜방아에 의존하였으므로 양다리방아는 필수적인 기구였다. 또, 박지원은 가랑이진 나무가 적은 것을 걱정하였으나 이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외다리방아도 볼씨를 튼튼하게 박지 않으면 흔들리게 마련이다. 곳에 따라서는 볼씨를 돌로 쓰기도 하는데, 이것은 1,000년이 지나도 끄떡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볼씨를 어떤 것으로 어떻게 박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 양다리방아 자체의 결점은 아니다.
셋째, 볼씨가 든든하면 방아머리도 흔들리지 않는다. 박지원이 본 방아는 이를테면 ‘극히 소수의 불량방아’일 것이다.
넷째, 논리적으로는 두 사람의 몸무게가 비슷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나 부인네 몸무게가 방아찧는 일에 방해가 될 만큼 크게 차이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때에는 무거운 사람이 방아다리 안쪽을, 가벼운 사람이 바깥쪽을 디디면 문제가 없다.
다섯째, 우리 나라에서는 ‘방아머리’라는 둥근 돌을 세워서 곡식이 튀어나가는 것을 막는다. 또, 외다리방아에 곡식을 쓸어넣을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방아 힘이 약한 까닭이니, 이러한 방아는 시간과 힘이 더 들게 마련이다.
여섯째, 방앗일은 단조로울 뿐만 아니라 힘도 많이 드는 까닭에 두서너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노래라도 불러가면서 해야 고달픔도 덜어진다. 디딜방앗일을 품앗이로 하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양다리방아야말로 서로 돕기를 즐기는 우리네 성품에 알맞은 이상적인 연장인 것이다.
일곱째, 확의 기울기도 눈썰미 있는 이가 미리 겨냥하면, 어려움이 없을 터이니 이것을 우리네 방아 자체의 결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외다리방아는 근래까지도 전라남도 보성군과 장흥군 일대에서 사용되었다. 양다리방아는 따로 방앗간을 세우고 설치하는 데에 반하여 외다리방아는 처마밑이나 헛간 한귀퉁이에 두며 주로 양념 등을 찧는 일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