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리의 안마을에서 강쪽을 따라 강기슭에 형성되어 있는 길이 1㎞, 너비 200m의 충적대지 위에서 고인돌 2기, 방형 돌무지무덤 1기, 무문토기시대 주거지 1기가 발견되어 1972년 7월 28일부터 8월 24일까지 발굴 조사되었다.
고인돌은 개석식과 파괴된 탁자식이 각 1기씩 조사되었다. 탁자식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1m 전후의 큰 돌로 3개의 지석을 세워 남북 1.6m, 동서 73㎝의 묘곽을 형성한 것이었다. 개석식은 탁자식에서 서쪽으로 2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화살촉 외에는 부장품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탁자식에서는 간돌도끼와 반월형석도·마제활촉 등이 반파된 채 출토되었다.
한편, 개석식에서는 한국의 암각화 중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물고기 선각화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고인돌 축조 전에 만들어졌음이 층위상 확실해 연대측정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학술상의 좋은 근거를 제공하였다.
방형 돌무지무덤은 원래의 모습이 많이 파괴되어 있었으나, 발굴 결과 저변 성토층(盛土層)의 한 쪽 길이가 11m임을 알 수 있었다. 이 고분은 처음 원토(原土) 위에 70㎝ 두께로 황갈색 점토와 청회색 사질점토를 성토해 다진 뒤, 그 위에 두께 40㎝의 황갈색 토양을 다시 깔고 하천석을 쌓은 고분이다.
고분은 황갈색 토양 위에 크기 50㎝ 내외의 큰 돌로 한 변의 길이 10m인 방형평면을 형성하고 그 돌 사이에는 진흙을 다져 넣어 평탄하게 만들었다. 그 중앙에 높이 60㎝ 내외의 편마암과 화강암을 사용해 동서 6m, 남북 7m 되게 묘곽구역을 설치한 뒤 이 속에 매장시설을 안치하였다.
이 묘곽 구역 내의 동서남북 네 귀에서는 관옥(管玉) 1개씩이 발견되었다. 중앙에 목관을 안치한 것은 철제꺾쇠의 출토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 묘곽구조의 외부 적석(積石)에서 인골이 3개처에서 출토되었는데 각각 1구의 시체를 매장했다고 생각한다면 모두 3명의 순장을 뜻하게 된다.
이러한 유물층 위에 다시 전체 1m 두께에 이르는 지름 50㎝ 내외의 큰 하천석을 한 변의 길이 8.4m되게 평면으로 다시 쌓아서 보호하였다. 이 적석 위에 다시 지름 30㎝ 내외의 하천석을 역시 30㎝ 정도 두께로 더 쌓고 그 위에 작은 편마암 잡석을 50㎝ 정도 덮었다.
이렇게 축조된 고분은 높이 2.7m에 달해 묘곽은 결국 지표상 1m 되는 적석 중심부에 설치되어 있었다. 결국 이 고분은 처음에는 저변을 크게 평면으로 다지고 그 위에 계단식 적석을 3번 만들었으며 다시 전체를 잡석으로 덮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초기 삼국시대 토기, 철제 소도(小刀)와 꺾쇠 등의 출토품과 묘의 구조로 보아 먼저 고구려의 고분축조와 대비된다. 그러나 방형고분은 초기 백제고분에서도 발견되며, 한강 하류에서도 초기 백제고분인 석촌동고분군 중에서 방형적석고분이 발견되므로 연계시켜 생각해보는 것이 옳겠다.
무문토기시대 주거지는 문호리 안동네에서 강가로 나가는 길 왼쪽의 전형적인 자연제방상에서 발견되었다. 현 지표 하 1.5m되는 깊이에서 발견된 이 주거지는 대체로 지름 5m 전후의 수혈식주거지들이다.
이 유적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에 상당히 장기간 군대의 주둔지가 되었던 관계로 거의 교란되어 있었다. 여기에서는 석기제작에 사용한 숫돌과 망치와 토기편이 발견되어 상당한 수량의 유물들이 채집되었다. 비록 교란, 파괴된 유적이지만 북한강유역에 산재한 무문토기의 강안유적 중의 하나임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