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리의 검터에서 새터에 걸치는 북한강유역에 위치하고 있는 24기의 고인돌 중 하나이다. 1972년 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주관 아래 실시된 팔당댐 수몰지구 유적조사에서 발견된 뒤, 같은 해 8월에 황용훈 등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이 고인돌은 이미 상석이 원위치에서 옮겨져 있었으나 상석을 옮긴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에 의해 상석의 원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그 곳에는 4개의 받침돌이 그대로 놓여 있어 이 고인돌이 기반식 고인돌이라고도 하는 남방식 고이돌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발굴 결과, 상석을 받치고 있던 4개의 받침돌 주변에는 지름 3m 정도로 10∼20㎝ 크기의 강돌이 깔려 있어 황해도 일대의 남방식 고인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적석묘역(積石墓域)시설이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적석부 밑에서는 원래의 받침돌을 남북축으로 해 설치된 남북 2.15m, 동서 0.7m 전후의 장방형 토광시설이 70㎝ 깊이로 확인되었다.
토광 내에서는 인골편(人骨片)으로 생각되는 작은 부스러기가 여러 편 채집된 외에 아무런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그러나 받침돌의 서북쪽과 서남쪽 모서리의 적석 내에서는 무문토기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고인돌은 토광을 파고 시체를 안치한 뒤, 토광의 나머지 공간을 고운 흙으로 채우고, 그 위에는 지름 3m 정도로 돌을 깔아 묘역시설을 만든 뒤, 토광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네 귀퉁이에 받침돌을 하나씩 놓고, 그 위에 편마암으로 만든 1.2m×0.9m 크기의 상석을 얹어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상석의 윗면에는 성혈이 지름 8.5㎝, 깊이 6.5㎝의 것이 7개, 지름 4㎝, 깊이 3㎝의 것이 45개가 만들어져 있어 이 고인돌의 축조방법과 함께 주목을 받았다. 성혈은 스칸디나비아와 시베리아 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는데 대체로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원시종교적인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이 고인돌의 성혈 역시 고인돌 축조시에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축조 후에 종교적인 이유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고인돌의 조사는 한강유역 청동기시대 주민의 분묘축조 방법과 그 주민이 가지고 있었던 원시종교의 일단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