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생. 아버지는 선양이며, 어머니는 김씨이다. 당시 자전거 판매상인 일미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중, 1913년 4월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와 매일신보사(每日申報社)가 인천(12일)·용산(13일)·평양(27일) 등에서 공동 주최한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 우승하였다.
특히, 27일 평양역전 광장에서 한국인 2명과 일본인 4명으로 실시된 조·일일류선수 연합경기에서는 엄복동과 황수복(黃壽福)이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함으로써, 당시 일제의 침략 야욕 앞에 국운이 쇠퇴해 가던 상황에서 국민들의 환호와 감격이 절정에 달하였다.
그 뒤 1922년 5월 31일부터 2일간 평양윤업회(輪業會) 주최로 광성고등보통학교(光成高等普通學校) 운동장에서 열린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도 일본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초까지 선수생활을 하다가 은퇴하고 말년에 극히 불우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 후 경기도 동두천과 연천 부근에서 떠돌이생활을 하던 중, 6·25전쟁 당시 동두천 부근의 어느 야산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숨졌다.
대한사이클연맹 자문위원인 박성렬(朴成烈)은 엄복동과 같이 선수생활을 할 때 찍은 사진과 그가 탔던 자전거를 비장하고 있다가 공개한 바 있다. 이 자전거는 박성렬의 형이 엄복동의 후계 선수인 조수만(趙壽萬)에게서 당시 500원(현 시가로 500만∼600만 원 상당)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영국 라지(Large)회사 제품인 이 자전거는 한·영 우호 및 제품 선전을 위해 보낸 두 대 중 한 대라고 한다. 엄복동은 비록 자전거경기라는 제한된 부분이었지만,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그의 우승으로 인한 민족적 일체감과 자긍심은 대단하여 국민적 영웅이라는 칭송까지 받게 되었다.
당시 어린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하늘에 안창남, 땅에 엄복동’이라는 유행어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대한사이클연맹은 불우한 처지에서도 사이클 선수로 대성하여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워 준 그의 기상을 드높이기 위해, 1977년부터 1999년까지 ‘엄복동배 전국사이클경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