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고종의 두 번째 비인 엄비의 조카이다. 1900년에 통신원전화과 주사를 시작으로 1901년에 내장원종목과장, 1902년에 군부 포공국장·한성부판윤, 1903년에 군부협판, 1904년에 법부협판·육군참장·군부협판·군부대신서리, 1905년 평리원재판장·적십자사부사장, 1906년 육군법원장, 1907년 봉상사제조 등을 지냈다. 1904년 군부협판으로 있을 때 근대적인 군사제도를 시찰하기 위해 일본을 시찰했다. 이 과정에서 근대 교육의 보급이 국가 발전의 핵심적인 사업임을 깨닫고 귀국했다. 이후 안종원(安鍾元)·이철우(李哲宇)·윤정석(尹晶錫)·박용숙(朴容淑)·장현주(張炫周)·김진현(金鎭賢)·한만용(韓晩容) 등과 함께 양정의숙(養正義塾)의 설립을 추진했다.
1905년 2월 올바르게 길러서 깨우쳐준다는 ‘몽이양정(蒙以養正)’의 기치 아래 기부금과 사재로 양정의숙을 설립, 숙장(塾長)에 취임했고, 1907년에는 엄비(嚴妃)로부터 200만여 평의 토지를 하사받아 학교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양정의숙을 설립한 후에 교육부총감사무서리·군부대신서리·평리원재판장·적십자사부사장·육군법원장·궁내부특진관 등 관계의 요직에 있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사망할 때까지 일체 관계를 떠나서 교육사업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1913년 재단법인 양정의숙 이사장, 같은해 10월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선임되었다. 1923년 조선체육회 이사로 활동했다. 1931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