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는 몸무게에 따라 10체급으로 나누어지며 같은 체급끼리 승패를 겨룬다. 소련 · 동유럽을 중심으로 구미에서 성행되는 경기로, 체력육성, 특히 근력양성에 좋은 종목이다. 고대부터 인간은 무거운 물건이나 돌을 들어올림으로써 힘을 겨루어 왔다. 특히 그리스시대에는 ‘힘의 시대’라 불릴 만큼 수많은 장사가 나타나 바위나 큰 통나무를 들어올리는 시합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역도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힘겨루기의 하나로 기원을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수 있다. 역도경기가 근대적인 형태를 갖춘 것은 1800년대 영국에서 덤벨을 사용한 것이 최초이며, 이 덤벨운동이 구츠무츠(Gutsumuts, J. C. F.)와 얀(Jahn, F. L.)에 의하여 보급되었다. 그 뒤 얀의 제자 아이젤렌(Eiselen, E. W. B.)에 의하여 덤벨 운동지도서가 출판된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에 이르면서 현대 역도와 같은 형태로 발전하였다.
1896년 아테네에서 개최된 제1회 올림픽대회 때부터 역도는 체조의 일부 종목으로 체급의 제한 없이 한 손으로 들어올리기와 양손으로 들어올리기의 두 종목이 실시되었다. 그 뒤 1920년 안트워프올림픽대회 때에 독립된 종목으로 채택되어 5체급의 경기가 실시되었으며, 같은 해에 국제역도연맹(IWF)이 결성되어 아마추어 스포츠로 발전하게 되었다. 1983년 현재 국제역도연맹의 가맹국 수는 107개국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인상과 용상의 두 종목만 실시하고 있으며, 체급은 52㎏급 ·56㎏급 ·60㎏급 ·67.5㎏급 ·75㎏급 ·82.5㎏급 ·90㎏급 ·100㎏급 ·110㎏급 ·110㎏급 이상의 10체급이 있다. 경기에 필요한 용구는 바벨 · 플랫폼(링) 등이 있다. 바벨은 바(bar)에 디스크를 끼워 사용하는데 공식 바벨은 바의 중량이 20㎏, 길이 2.2m이며 디스크는 20㎏ ·15㎏ ·10㎏ ·5㎏ ·2.5㎏ ·1.25㎏ 등의 여러 종류가 있다.
링은 경기를 하는 대(臺)로서, 4×4m의 크기에 두께 10㎝로 되어 있다. 인상(snatch)은 바를 두 손으로 약간 넓게 쥐고 단숨에 머리 위로 두 팔이 완전히 뻗칠 때까지 수직으로 끌어올린다. 머리 위로 높이 올라갔을 때 손목을 젖히고 두 팔을 뻗친 채로 다리를 적당한 간격으로 벌린 뒤 직립자세를 유지하여 심판의 ‘다운’ 신호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이때 두 팔의 뻗침이 불균등하거나 일시적으로 중단된 경우 또는 두 팔을 뻗는 동안 프레스동작이 있으면 반칙이 된다.
용상은 바를 단숨에 어깨 높이까지 가져온 뒤, 두 다리를 굽히고 팔을 뻗치며 두 발을 동일선상에 되돌린 다음 ‘다운’ 신호를 기다린다. 이때 대퇴부에 팔꿈치가 닿거나 두 다리를 펼 동안 팔을 밀거나 두 발을 되돌릴 때 뻗쳤던 두 팔을 늦추면 반칙이 된다.
심판은 각 체급마다 1명의 주심과 2명의 부심으로 구성되고 심판결과는 경기장 위에 청 · 적색의 등을 설치, 사용한다. 또한 특급심판으로 구성된 3명의 배심이 경기의 올바른 운영여부를 확인, 감독하게 된다.
역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26년 일본체육회 체조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서상천(徐相天)에 의해서이다. 그는 역도에 관한 원서를 구하여 역도의 이론과 실제 수련을 연구, 같은 해 종로에 있는 자택에서 조선체력증진법연구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1930년에는 사재(私財)로 도장을 건립하는 동시에 연구회를 중앙체육연구소로 개칭하였으며, 1931년에 『현대체력증진법』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그 결과 역도 보급이 전국에 확대되었고 전국에 중앙체육연구소 지부가 조직되었다. 한편 1928년 2월에 중앙기독청년회 체육부 주최로 우리나라 최초의 역도경기인 현상역기대회(懸賞力技大會)가 개최되었다. 1936년 5월에는 조선역기연맹(1939년에 조선역도연맹으로 개칭)을 조직하였으며 그 해 5월 제1회 전일본중량거(重量擧)선수권대회에서 김용성(金容星)이 경체급에서, 김성집(金晟集)이 중체급에서 우승하였다.
1937년 제2회 대회에도 4명을 파견하여 모두 우승하였으며, 1938년 10월 제3회 대회 때는 남수일(南壽逸)이 60㎏급 인상과 추상에서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것을 비롯하여 6체급에서 우승하였다. 명칭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계속 역기(力技)라 불리다가 광복과 함께 역도로 개칭되었다.
1946년 5월 제1회 전국역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대회에서 남수일이 추상에서 107㎏이라는 세계신기록을 수립하였다. 1949년 8월 대한역도연맹이 국제역도연맹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9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 3명의 선수를 파견, 60㎏급의 남수일이 2위, 75㎏급의 김성집이 3위, 56㎏급의 박동욱이 4위에 입상하여 단체 2위를 차지하였다.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대회에는 8명의 선수가 출전하여 이규혁(李圭赫) · 남수일이 4위, 김성집이 3위를 하였으며, 1952년 제15회 헬싱키올림픽대회에는 4명의 선수가 출전하여 김성집이 3위, 김해남(金海男) · 김창희(金昌熙)가 각각 4위를 하였다. 1956년 제16회 멜버른올림픽대회에는 김창희가 3위에 입상하여 다시 한번 한국 역도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한편,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7체급 중에 김성집 · 유인호 · 김창희 · 고종구(高宗具) · 조봉목(趙奉穆) 등이 5체급을 석권하고 나시윤이 2위를 하였으며, 특히 56㎏급의 유인호는 용상에서 285파운드(130㎏)를 들어 세계신기록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 뒤 1958년 제3회 대회, 1966년 제5회 대회, 1970년 제6회 대회에서는 각각 2체급, 1974년 제7회 대회, 1978년 제8회 대회에서는 각각 1체급에서 우승하는 부진을 보였다.
1982년 인도에서 개최된 제9회 대회에서는 안지영(安智榮)과 안효작(安孝爵)이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전병국(全炳國) · 황우원(黃祐元) · 이민우(李民雨)가 각각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제7회 아시아역도선수권대회 종합 2위, 제11회 세계주니어역도선수권대회 종합 5위로 세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대회에서 56㎏급 전병관(全炳寬)이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69㎏급 김학봉(金鶴鳳)이 용상 195㎏을 들어올려 세계신기록을 세웠으며, 김태현(金泰鉉)도 105㎏ 이상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