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면이 사각형인 평지성으로 당시에는 고염성이라고 하였다.
『연안읍지(延安邑誌)』에 따르면, 연안읍에는 연안읍성과 연안산성이 있는데, 연안읍성은 성벽의 한 가닥이 연안읍내 앞산인 남산 남쪽 기슭을 따라 연성리를 지나 모정리에 이르러 설봉산에 잇닿았고, 다른 한 가닥은 남산 가운데 등을 넘어 연안읍내 도로를 지나 관천리를 거쳐 설봉산으로 올라갔다.
이 읍성은 석성으로 1555년(명종 10) 부사 박응종(朴應宗)이 쌓았는데 둘레는 1,389척, 높이 15.7척이다. 반면, 연안산성은 고려 공민왕 11년(1362)에 쌓은 돌성으로 봉세산(鳳勢山)의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쌓았는데, 둘레가 5,400척으로 일명 봉세산성이라고도 한다.
연안읍성에는 옹성(甕城 : 성문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이 2개, 성가퀴[城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693개 있었는데, 거기에는 활과 총을 쏘는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성문은 동서남북 네 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문자리만 남아 있다. 성안에는 서풍천정(西豊泉井)과 군자정(君子井)이라는 우물이 있었고, 성벽 바깥으로는 해자(垓字 : 성 밖으로 둘러 판 못)를 넓게 파고 북쪽의 봉세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모아 채웠다.
이처럼 연안읍성은 규모는 작으나 성을 튼튼히 지킬 수 있는 방어시설들을 잘 갖춘 견고한 성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해인 1591년(선조 24) 부사 신격(申格)이 조헌(趙憲)의 권고에 따라 중축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수만 명의 대병력으로 연안성에 침입하였으나, 성안에 있던 의병과 부녀자들이 일치단결하여 왜적을 물리친 바 있다.
이 전투를 연안대첩(延安大捷)이라 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남산 위에 대첩비를 세웠는데, 이 비는 특히 연안성 전투를 총지휘한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의 전공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1608년(선조 41)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일제는 연안읍 도시건설을 구실로 이 성을 파괴하였으나, 성터는 현재 잘 보존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