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緣會)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국사를 역임한 승려이다. 연회는 『법화경』을 바탕으로 보현관행(普賢觀行)이라는 수행법을 통해 법화삼매(法華三昧)에 이르기를 추구했다. 연회는 선덕왕에 이어 국인의 추대로 옹립된 원성왕대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왕에게 사상적 조언을 할 수 있는 국사로 임명되었다. 원효의 스승인 낭지의 전기를 저술하였다고 전해진다.
연회(緣會)의 가계나 출생 및 사망 시기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연회에 관한 내용은 『삼국유사(三國遺事)』 「피은(避隱)」편 ‘연회도명문수점(緣會逃名文殊岾)’조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 신라 불교계에는 왕실 중심의 불교와 서민 불교 외에 세속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연에 은둔했던 수행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은자(隱者)나 일사(逸士)로 알려져 있는데, 「피은」편에 그들의 행적이 전한다.
연회는 일찍부터 영취산(靈鷲山) 영취사(靈鷲寺)로 몸을 피해 은둔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읽고 보현보살의 수행법인 보현관행(普賢觀行)을 닦았다. 연회가 머물던 용장전(龍藏殿)의 뜰 앞 연못에 핀 연꽃은 사시사철 시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상서로운 그의 행적을 전해 들은 원성왕이 그를 국사(國師)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연회는 암자(庵子, 菴子)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가 서쪽 고개를 지나는데 바위 옆에서 밭을 갈던 한 노인이 물었다. “법사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연회가 대답하였다. “내가 들으니 나라에서 잘못 알고 나를 벼슬로 얽어매려하므로 피해 가는 중입니다.” 노인이 듣고 말하였다. “법사의 이름은 여기서도 팔 만한데, 왜 멀리 가서 팔려 하시오? 법사야말로 이름 팔기가 싫지 않은가 보구려.” 연회는 노인이 자신을 업신여긴다고 여기어 다시 길을 갔다. 몇 리쯤 가다가 시냇가에서 한 노파를 만났다. 노파가 물었다. “법사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연회가 전과 같이 대답하니 노파가 말하였다. “앞에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소?” 연회가 대답하였다. “어떤 노인이 나를 몹시 업신여기기에 화를 내고 왔습니다.” 노파가 말하였다. “그분은 문수대성이오. 어찌 말씀을 듣지 않았소?” 연회가 그 말을 듣고 놀랍고 두려워 급히 노인에게 되돌아가서 사과하였다. 노인은 시냇가에서 연회를 깨우쳐 준 노파가 변재천녀(辨才天女)라고 알려 주고는 사라졌다. 연회가 암자로 돌아오자 얼마 뒤에 왕의 사자가 조서를 받들고 와서 그를 불렀다. 연회가 대궐에 들어가니 왕은 그를 국사로 책봉하였다. 이후 연회가 노인에 의해 감응을 받은 곳을 문수점(文殊岾)이라고 하고, 노파를 만난 곳을 아니점(阿尼岾)이라 하게 되었다.
연회가 고승 낭지(朗智)의 전기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낭지는 법흥왕대에 영취산에서 거주하며 『법화경』을 읽던 인물이다. 원효는 낭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따라서 연회가 낭지, 원효와 사상적으로 유사한 계통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연회가 『법화경』을 읽었다는 것에서 그가 법화신앙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연회가 행했다는 보현관행은 보현보살을 친견(親見)하기 위해 행하는 수행법을 말한다. 따라서 연회는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수행한 것이다.
연회는 『법화경』의 가르침에 따라 영취산에 머물며 조용히 좌선 수행을 하고 법화삼매를 닦았다. 그러다 원성왕의 부름에 응하여 국사가 되었다. 원성왕은 국인의 추대를 받아 김주원의 세력을 물리치고 후사가 없는 선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따라서 원성왕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연회와 같은 인물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연회는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법화사상을 수용했고 원효의 화쟁사상에도 밝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러한 사상적 경향을 바탕으로 원성왕이 주도하는 신정권을 정치적으로 지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