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1년(공양왕 3)에 경기의 차역(差役)이 과중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건의를 좇아 경기 좌·우도에 각각 두어졌다.
품계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4품 이상으로, 그 가운데 정2품 이상으로서 차견(差遣)되면 도염문사(都廉問使)라 하고 종2품 봉익대부(奉翊大夫)·통헌대부(通憲大夫)이면 염문사, 그 이하이면 염문부사(廉問副使)라 하였다.
직임은 형명(刑名)·전곡(錢穀)·군정(軍情)의 사무(事務)로부터 관리들의 전최(殿最), 민간의 사송(詞訟)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였다. 단, 염문사가 두어지기 1년 전인 1390년에 역시 경기 좌·우도에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설치되었는데, 양자간의 기능상 차이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에는 경기좌·우도에 안렴사(按廉使)가 설치되었다가 다음해에 도관찰출척사로 개칭되는 변화가 있었으나, 염문사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때 폐지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