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력을 약화시킨 것을 접종하는 경우로는 BCG접종·광견병예방접종 등이, 죽은 균을 사용하는 예로는 장티푸스·콜레라 예방접종 등이 있다. 독소로는 디프테리아·파상풍 등의 톡소이드(toxoid:독소)가 있다.
예방접종의 효시는 고대 인도와 아라비아 그리고 중국에서 널리 시행되었던 인두종법(人痘種法)이다. 이는 경증(輕症) 천연두환자로부터 고름을 채취해서 건강한 사람에게 접종을 시켜 가벼운 감염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인 티모니(Timoni,E.)에 의하여 처음 영국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인두접종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오히려 천연두를 더욱 만연시킬 위험이 있고, 접종을 받은 사람이 중증환자가 되는 문제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1796년 제너(Jenner,E.)에 의하여 우두종법(牛痘種法)이 발견되어 그것으로 대체되었고, 우두종법도 비슷한 반론에 부딪혔지만 계속 보편화되었다.
인두종법이나 우두종법은 모두 경험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과학적인 예방접종은 전염병이 미생물들에 의해서 발생된다는 것이 알려지고, 그러한 미생물이 동정(同定, identification)되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1876년 코흐(Koch,R.)에 의하여 탄저병균이 발견되었고, 1880년 장티푸스균, 1882년 결핵균, 1883년 콜레라균, 1884년 디프테리아균, 1886년 폐렴균, 1898년 적리균(赤痢菌) 등이 잇따라 동정되었다.
이와 같은 많은 미생물이 밝혀지고 그 병원체로서 지니는 역할이 확인됨에 따라, 점차 미생물의 작용기전(作用機轉)에 관련해서 감염의 성립기전이나 그 예방법과 치료에도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파스퇴르(Pasteur,L.)는 1880년부터 1888년에 걸쳐 병원미생물의 독성변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닭콜레라·돼지단독[豚丹毒]·광견병에 대한 예방접종을 착상하였다.
이어 디프테리아수동면역백신이 1890년 프랑켈에 의하여, 파상풍면역이 일본인 기다사도(北里柴三郎)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이어서 콜레라와 페스트·장티푸스·결핵·황열병(黃熱病)·소아마비·디프테리아능동면역 예방접종백신이 만들어졌다.
우리 나라에 예방접종이 처음 도입된 것은 정약용(丁若鏞)에 의해서이다. 그 내용은 정약용의 저서인 ≪마과회통 麻科會通≫의 권말에 종두요지(種痘要旨)라는 이름으로 부록되어 있다(1800년, 정조 24).
일찍이 정약용은 ≪강희자전 康熙字典≫에서 두즙(痘汁)을 직접으로 인체에 접종시키는 종두법이 있는 것을 알고, 그 법이 우리 나라에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차에 1879년 북경으로부터 돌아온 의주사람이 그 방서(方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책을 구한 것이 ≪정씨종두방 鄭氏種痘方≫이다.
한편 이 책을 본 박제가(朴齊家)는 또다른 비슷한 방서를 제시하였는데, 그것이 ≪유과종두심법 幼科種痘心法≫으로 정약용의 ≪종두요지≫는 이 두 책을 합하여 만든 것이다.
그 실시는 박제가가 영평(永平: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부사로 부임한 뒤 처음으로 실시, 성공하였으며 그 법은 포천의 의사 이종인(李鍾仁)에게 전수되었다. 이종인은 인두종법을 배운 뒤에 그 두종을 가지고 한성 북방의 부유층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접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1801년 순조가 즉위하면서 서학을 탄압하였고, 그에 따라 정약용과 박제가는 유배당하고, 이종인은 무함(誣陷)에 걸려 거의 죽게 되어 이 인두종법은 일시 중단되었으나, 그 뒤 차차 영남으로부터 서울까지 보급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우두종법이 최초로 소개된 것은 정약용의 ≪마과회통≫ 권말에 부기된 <종두기법 種痘奇法>에서인데, 전래된 시기는 1828∼1849년 사이이다.
우리 나라의 우두종법은 서학 및 천주교의 관계로 정약용 및 그 일파 등에 의하여 북경방면으로부터 비밀리에 수입되었으며, 그 뒤 심양(瀋陽)으로부터 국경방면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들어 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보편적으로 실시되지 못하고, 국부적으로 실행되어 오다가 서학의 압박으로 말미암아 종국에는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1876년 개항 이후 종두법은 지석영(池錫永)의 노력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는 1876년 일본인에게 종두법을 배워 개인적인 시술에 힘썼으며, ≪우두신설 牛痘新說≫을 지어 그 필요를 선전하여 우두법의 보급에 크게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우두법의 실효가 나타남에 따라 1882년 국가의 인정을 받게 되어 그 해 9월에는 전라도 전주성 내에 우두국(牛痘局)을, 1883년에는 충청도 공주부에 우두국을 신설하여 공식적으로 종두법을 실행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95년에 새로 개혁된 의료제도에 따라서 내부령(內部令)으로 <종두규칙>이 반포되었는데, “모든 어린아이는 생후 70일에서 만 1년 이내에 반드시 종두를 행할 것”을 의무로 규정하였다. 1899년에는 두묘(痘苗)를 제조하고 두무(痘務)를 시행할 종계소(種繼所)를 설치하였다.
1900년에는 <한성부종두사관제 漢城府種痘司官制>를 반포하는 동시에 <한성종두사세칙>까지 제정하였으며, 내부에서는 13도 관찰사에게 훈령을 내려 각 도 종두사무요원으로 하여금 각 도와 군의 종두사무를 보고하도록 하여, 종두실시와 천연두예방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석영의 역할은 두드러진 것이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관서지방 및 국경지대에서 활약한 최창현(崔昌鉉)·이유현(李有鉉) 등의 공로도 적지 않은 것이었다.
종두법의 역사적 의의는 전염병을 확실하게 관리할 능력을 비로소 가지기 시작한 데 있고, 또한 많은 인명을 병마에서 구해냈다는 데 있다. 콜레라·장티푸스·발진티푸스·성홍열·디프테리아·뇌척수막염 등에 대한 예방접종은 일제강점기에 가서 수용되었다.
장티푸스접종은 1926년에 1.3%, 1938년에는 최고 6.2%가 접종하였다. 콜레라는 상시접종이 아니었고, 국내에 콜레라가 유행하였을 때마다 수시접종하였다.
콜레라·장티푸스를 제외한 나머지 질병에 대한 예방접종은 그 비용이 많이 들었고, 그 효과가 아직 학문적 검토로 사용되는 정도였기 때문에 그다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염병발생과 유행을 방지하여 국민보건을 향상, 증진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염병예방법>이 1954년 2월에 제정, 공포되었고 1963년 2월과 1976년 12월에 개정된 바 있다. 또한 1969년 11월에는 <전염병예방법시행령>이 공포되었고, 1977년 8월에는 <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이 공포되었다.
<전염병예방법>에서는 전염병을 제1종·제2종·제3종 전염병으로 나누고 있는데 신고와 등록의 의무, 건강진단·예방접종·예방시설, 환자 및 환가(患家) 예방조처 등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다.
국민은 법에 의한 예방접종을 받아야 하며 보호자는 만 14세 이하이거나 정신병자 또는 금치산자로 하여금 예방접종을 받도록 조처하여야 한다. 정기예방접종은 천연두·디프테리아·백일해·파상풍·장티푸스·콜레라 및 결핵의 7종이며, 임시예방접종은 시장·군수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실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