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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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최초의 참전부대인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을 방어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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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미군 최초의 참전부대인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을 방어한 전투.
내용

미국 정부는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여 한국정부의 지원요청이 있자,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장군에게 선발대를 파견하여 사태를 판단하도록 했다. 이에 맥아더는 일본에 주둔 중인 미 제24사단의 각 부대에서 병력을 선발하여 스미스특수임무부대를 편성했다.

스미스(Smith) 중령의 지휘 아래 편성된 스미스부대는 1950년 7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북한군이 남진하는 경부국도로 북상하였다. 7월 4일 오산 북방 죽미령 일대 양쪽고지에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2개 소총중대와 75미리 무반동총 4정 및 4.2인치 박격포 4문을 포함하여 모두 406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그 밖에 105미리 곡사포 6문으로 이루어진 미군 1개 포대의 화력을 지원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보유한 포탄은 1,200발이었고, 그 가운데 대전차 포탄은 6발에 지나지 않았다.

경부국도와 철길 주변으로 100m 남짓한 높이의 산등성이들을 끼고 엉성하게 배치된 미군은 북한공산군이 미군의 모습을 실제로 보면 이내 물러설 것이며, 한두 차례의 정찰작전을 마친 다음 곧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낙관론에 빠져 있던 터여서 제대로 싸울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때마침 그 후방의 오산에서는 국군 17연대가 미공군의 오폭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은 채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 넘쳐 있던 미군은 국군과 협공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수원을 점령한 북한군 정예부대인 제4사단은 7월 5일 아침 107전차연대를 앞세워 스미스특공대를 공격해 왔다. 8시 16분 미군은 첫 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그러나 무반동총과 로켓포는 적 전차를 멈춰 세우지 못하였다. 미군 포병은 죽미령을 넘어 미군의 보병진지를 짓밟고 들어 오는 전차 2대를 직접 조준하여 쏘아 파괴하였으나 대부분의 전차들은 미군 보병의 방어선을 지나 남쪽을 향해 내려갔다.

11시쯤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미군은 적 전차에 박격포사격을 퍼부었으나 적 전차는 이를 무시하고 미군 보병들을 직접 조준하여 사격하는 동시에, 적 보병들은 미군 방어선의 양쪽 옆구리를 돌아 내려오면서 포위망을 좁혀 왔다.

미군은 적의 포위망이 시시각각 좁혀져 들어오는데다, 무전기마저 고장이 나서 포병의 지원사격을 받지 못하게 되자, 오산쪽으로 철수를 개시했다. 그러나 오산마저도 북한공산군의 수중에 먼저 들어간 상태라서 모든 장비와 화포를 버리고 안성으로 철수했다. 국군 17연대는 오산에서 조치원으로 후퇴했다.

스미스부대는 첫 전투에서 150여 명이 죽고 26명이 실종되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맥아더 장군은 죽미령 전투 결과를 보고 받고 비로소 북한군의 전력을 가늠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강선 방어와 초기 지연작전』(군사편찬연구소, 2006)
『한국전쟁』상(국방군사연구소, 1995)
『오산-대전전투』(국방군사연구소, 1993)
『한국전쟁사』3(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70)
집필자
양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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