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오함성(吳咸聲). 이밖에도 전광(全光) · 오동실(吳東實) · 오범철(吳範喆) · 오봉환(吳鳳煥) 등의 가명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함경북도 온성 출신.
1906년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뒤늦게 중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 모금에 열신하였다. 이 해 가을 상해로 가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압록강대교 폭파를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2년 3월 상해에서 김익상(金益相) · 이종암(李鍾巖) 등과 함께 일본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를 권총으로 저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도주하다가 검거되었다. 상해 일본영사관에서 예심을 거쳐 나가사키[長崎]재판소로 이송될 예정이었으나, 유치장에서 탈출하여 광둥[廣東]을 거쳐 독일로 갔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독일에서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모스크바공산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이동휘(李東輝)와 상의하여 적기단(赤旗團)에 참여하였다. 1926년 광둥으로 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김산(金山, 본명 張志樂) · 김충창(金忠昌, 본명 金星淑) 등과 함께 광주폭동 · 광주코뮌에 참가하였다.
1929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계속해서 중국공산당 조직에서 활동하였다. 1936년 동만특위 서기 위극민(魏極民) 밑에서 위원을 지냈으며, 동시에 제1로군 제2군 당위원회 정치주임도 역임하였다.
1935년 코민테른 제7회 대회에서 반제통일전선 채택하자, 이에 1936년 6월 10일 엄수명(嚴洙明) · 이상준(李相俊) 등과 함께 조국광복회를 발기하였다. 그리고 남만성위원회 상무위원선전부장으로서 제1로군 비서차장 겸 군수처장을 지냈다.
1941년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 경찰의 토벌작전에 쫓겨 투항하였고, 이후 만주국 치안부 고문을 지냈다. 일본이 패망한 뒤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혀 인민재판을 거쳐 타살되었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