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황주 출신. 1912년 황주 양성학교(養性學校)를 마치고 1916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하였다. 1919년 평양청년단 황주대표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사관학교 속성과를 수료하였다. 1920년 황해도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 조직의 사명을 띠고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같은 해 광복군사령부 오동진(吳東振)부대의 소대장으로 군자금모금과 일제기관 파괴의 지령을 받고 김명권(金明權)·서봉근(徐奉根)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런데 1921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독립군을 수색중이던 일본경찰 4명을 만나 불심검문을 당하자 권총으로 일본 순사부장을 사살하였다.
그 뒤 김명권은 평안북도 지방으로 피신가고 자신은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황주에 도착하여 은신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 경찰에 포위당하였으나, 이들과 교전하여 1명을 사살하고 뒷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서흥 산중에서 일본경찰과 싸운 다음 황주군의 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일본경찰 200여 명에 의해 산성이 포위되었으나, 지리의 이점을 이용하여 1주일을 버티다가 탈출하여 신계군 은점(銀店)장터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결국 서흥경찰서원 26명의 습격을 받아 잡혀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을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9년 출감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일제의 감시 속에서 대동정미소(大同精米所)를 경영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자 황주군자치위원회고문이 되었다. 이해 월남하여 서울에 와서 삼월동지회 청년부장과 김구(金九)의 비서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전국 비상국민회 대의원, 전국혁명총동맹 조직부장을 지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