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보성 출신.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의 명인이며 명고수(名鼓手)인 수관(壽寬)의 아들이다.
1930년대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 등과 조선성악연구회를 만들어 기악부를 담당하였다. 광복 뒤에는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 산하의 국극사(國劇社)에 참가하여 창극재건에도 공로가 컸다.
그러나 그의 장기는 역시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으로, 특히 가야금병창은 고음에서의 풍부한 성량, 익살과 재담을 섞은 사실적인 형용동작인 사체와 너름새로 그를 당할 이가 없었다고 한다.
「흥보가」중 ‘돈타령’을 잘하였고, 「심청가」중 심청을 어르는 대목은 가장 뛰어난 더늠으로 일러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