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옥봉(玉峰). 왕실 종친으로 군수를 지낸 이봉지(李逢之)의 서녀이다. 미천한 신분으로 인해 조원(趙瑗)의 소실이 됐다.
15세에 소실이 돼 40세가 되기 전 임진왜란을 만나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옛 관습으로 보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첩을 두는 예는 극히 드물었다. 조원이 문과에 급제한 것은 1572년(선조 5)이다. 조원 또한 과거에 급제한 후에 옥봉 이씨를 맞아들였다면, 소실이 된 나이가 15세이므로 죽은 나이는 대략 35세 안팎이 될 것이다. 임진왜란은 20년 후인 1592년에 일어났다.
옥봉 이씨가 남긴 시는 모두 32편인데 1704년(숙종 30)에 조원의 후손인 정만(正萬)의 손에 의하여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끝에 부록으로 편입돼 오늘날까지 전하게 됐다. 옥봉 이씨의 시는 여성으로서 정한을 잘 살렸는데 거의 대부분 이별을 주제로 읊은 시들로 그 가운데에 「규정(閨情)」과 남편에게 보낸 시 「자술(自述)」 등이 대표 작품이다. 「자술」은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증운강(贈雲江)」으로 되어 있다.
허균(許筠)은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옥봉의 시가 매우 밝고 강건하여 자못 부인의 화려하게 꾸민 말이 아니라 했다.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도 그녀의 시는 맑고 건장하여 부녀자의 화장 같은 꾸밈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시상의 전개가 여성답지 않고 뛰어남을 매우 높이 칭찬했다.
신흠(申欽)은 “근래 규수의 작품 중 승지조원의 첩 옥봉 이씨가 제일이다.”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홍만종(洪萬宗)은 『시평보유(詩評補遺)』에서 「춘일즉사시(春日卽事詩)」가 만당(晩唐)의 품격이 있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는 “(사람들이) 조원의 첩 옥봉 이씨를 조선 제일의 여류시인이라 일컫는다.”고 했다.
옥봉 이씨는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여류시인으로 이미 당대에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