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전기 문종 때, 어사대부·동북면행영병마사·판상서형부사·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한편, 『고려사』에는 왕무숭의 아들도 확인된다. 교위(校尉) 거신(巨身)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아버지와 함께 안동(安東)으로 쫓겨났던 왕정(王珵)이 그 사람이다. 그러나 4에서는 그가 평양공(平壤公) 왕기(王基)의 아들이고 안동으로 유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이로써 보면 왕무숭은 문종(文宗)대에 요직을 역임하면서 왕의 측근으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071년(문종 25) 9월에 왕이 중양절(重陽節)을 맞이하여 상춘정(賞春亭)에 나가서 태자·계림후·평양후와 함께 재상 이유충(異惟忠)·왕무숭 등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고 그들에게 각각 말 한 필씩 주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왕무숭은 1072년(문종 26) 7월에 발생한 교위(校尉) 거신(巨身)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 교위 거신이 일찍이 문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의 넷째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인 평양공(平壤公) 왕기(王基: 1021∽1069)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음모했다는 것이다. 병사(兵士) 장선(張善)이 이러한 사실을 고발하자, 거신의 목을 베고 그 일족까지 모조리 처형하였다. 평양공 왕기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 아들 왕진(王璡)을 해남(海南)으로 유배 보내고 왕영(王瑛)은 나이가 어리다고 처벌을 면하였다.
평장사 왕무숭은 장녕궁주(長寧宮主) 이씨(李氏)와 수안택주(遂安宅主) 이씨(李氏)와 함께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리하여 왕무숭이 그의 아들 왕정(王珵)과 함께 안동(安東)으로 쫓겨나고, 장녕궁주와 수안택주는 곡주(谷州: 현, 황해도 곡산군)로 쫓겨났다. 이 사건은 문종의 남경(南京: 현, 서울특별시) 설치에 따른 반발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이공수묘지명(李公壽墓誌銘)」
단행본
- 김용선 편,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한림대출판부, 2001)
- 박용운, 『고려시대사(상)』 (일지사, 1986)
-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논문
- 최혜숙, 「고려시대 남경 설치배경에 대한 재검토」 (『사학연구』 58·59, 한국사학회, 1999)
- 채웅석, 「고려문종대 관료의 사회적 위상과 정치운영」 (『역사와 현실』 27, 한국역사연구회, 1998)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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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고려사』에서는 해남(海南)이라 하였고, 『고려사절요』에서는 남해현(南海縣)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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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세시 명절의 하나로 음력 9월 9일을 이르는 말. 이날 남자들은 시를 짓고 각 가정에서는 국화전을 만들어 먹고 놀았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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