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속명은 이학수(李學洙) 이명은 이시열(李時說). 법호는 운허(耘虛)이며 용하(龍夏)는 법명이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
7세부터 1907년까지 고향의 회보재(會輔齋)에서 사서(四書)를 배우고, 1909년 10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평양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2학년까지 수학하였다.
1912년 1월에 만주로 건너가서 봉천(奉天)에 있는 한인교포학교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원으로 재직하였고, 이 해 6월부터는 배일단체인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가입하여 배일정신을 고취하였다.
1914년 2월부터는 봉천성 홍묘자(紅廟子) 흥동학교(興東學校)를 설립해서 교포 아동교육에 전념하였고, 1917년 4월부터는 배달학교(倍達學校)를 설립하여 1919년 3월까지 교포 아동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4월부터 12월까지 봉천에서 독립군정기관지인 『한족신보 韓族新報』 사장에 취임하여 신문을 간행하였고, 1920년 2월에는 독립운동기관인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해서 활동하였다.
그 뒤 일본경찰을 피해 귀국하여 1921년강원도 회양군봉일사(鳳逸寺)에 은신하였다가 이해 5월경송(慶松)을 은사로 고성군 유점사(楡岾寺)에서 득도하였으며, 6월부터 12월까지 유점사 강원에서 불교초등과를 이수하고 절에서 서기를 맡아보았다.
이어서 1924년 5월부터 9월까지는 동래 범어사 강원에서 진응(震應)에게 사교과(四敎科)를 배운 뒤, 1926년 2월 청담(靑潭)과 함께 전국불교학인대회(全國佛敎學人大會)를 서울 안암동개운사(開運寺)에서 개최하여 학인연맹(學人聯盟)을 조직하였다.
1928년 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서울 개운사 강원에서 석전(石顚)에게서 대교과(大敎科)를 배웠다. 1929년에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 보성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930년 9월부터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 가입하여 조국 광복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36년 2월에는 경기도 양주군봉선사(奉先寺)에 강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노력함과 함께 1945년 11월 대한불교조계종 경기도 교무원장이 되어 이듬해 3월까지 재임하였으며, 4월부터 양주군에 광동중학교(光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또 1952년 1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공주 동학사(東鶴寺) 강원 강사에 취임한 것을 비롯하여 1954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통도사 강원의 강사로, 1955년 4월에는 진주 연화사(蓮華寺) 포교사로 취임하였다. 1955년 9월부터 1958년 5월까지는 해인사 강사로 활동하였고, 1959년 10월에는 봉선사 주지에 취임하였다.
이에 앞서 1953년 9월에는 사단법인 애국동지원호회(愛國同志援護會)에서 『한국독립운동사 韓國獨立運動史』를 편찬하는 일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1957년 7월부터는 불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평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1964년에는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이 되었으며, 열반에 드는 날까지 대장경(大藏經) 국역사업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여 한국불교 역경사에 길이 빛날 업적을 남겼다.
1961년에는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하였고, 1962년에는 종교인으로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1978년에는 동국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명리와 형식에 초연하였으며, 열반에 들기 9년 전에 유언인 「다경실유촉(茶經室遺囑)」을 남겼는데, 이는 자꾸만 세속화되어 가는 후학들에게 크나큰 귀감이 되고 있다. 1980년 11월 18일에 봉선사에서 나이 89세, 법랍 59세로 입적하였다.
중요 저서 또는 역서로는 『불교사전』·『불교의 자비』·『불교의 깨묵』·『한글 금강경』·『자비수참(慈悲水懺)』·『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수능엄경주해(首楞嚴經註解)』·『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대교지문(大敎指文)』 등이 남아 있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