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철봉(鐵棒). 평안남도 강동 출신.
1905년 이진룡(李鎭龍)을 따라 평산에서 의병에 가담하여 일제에 항전하였고,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남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하여 조맹선(趙孟善)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전력하였다. 1919년의 3·1운동 뒤에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였다.
1920년 3월 백운한(白雲翰)·주상옥(朱尙玉) 등과 함께, 친일 주구인 평안북도 선천군 태산면장 김병준(金炳俊)과 면서기 김은기(金殷基)에게 공금 749원59전을 거둔 뒤 처단하였다. 같은 해 독립단과 한족회 및 대한청년단연합회가 연합하여 광복군사령부로 통합되자 제2중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이명서(李明瑞) 등과 함께 몰래 국내로 들어와 의주군 고령삭면에서 일본 경찰 야마구치[山口] 외 1명을 때려 죽였다. 그 뒤 조태원(趙泰源)·김여호(金麗浩)·이수영(李秀榮) 등과 군자금 모금차 박천 탁인수(卓麟洙)의 집에 갔다가 그의 밀고로 일본 경찰의 포위 공격을 당하여 교전, 김여호는 전사하고 그는 탈출에 성공하여 만주 본대로 귀환하였다.
그 후 재만 군사단체가 통합하여 참의부(參議府)가 설립되자 사령장의 서기로 활동하였다. 1935년 국내에 들어와 활동 중 성천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잡혔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불복, 항소하여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광복을 맞았다.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고문과 오랜 옥고의 여독으로 평생을 반신불수로 지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