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도는 『광운』 등 운서에 실현되지 않은 오음청탁(五音淸濁)·개합(開合)·등운(等韻) 등 성운(聲韻)의 상호 관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제시한 도표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운도(韻圖)는 운서(韻書)와 함께 한자의 음을 나타내는 발음사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인 『동국정운』(1447) 서문에서는 중국의 소옹과 사마온공이 만든 운도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사성통고』(1455) 범례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시절의 우리나라 언어학자들이 여러 가지 운도와 운서를 참고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소옹의 『황극경세성음창화도』는 북송 때의 현실음을 나타낸 것으로 훈민정음 창제 때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운도이다.
운도는 운서의 반절(反切)과 더불어 한자음을 심사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된다.
운도 작성에 관련되는 학문을 등운학(等韻學)이라고 하는데, 등운학에서는 중국 한자음의 성모(聲母)를 조음위치(調音位置)에 따라 나누어 36자모(字母)로 표시하게 하고, 운모(韻母)의 주모음(主母音)을 개구도(開口度)의 광 · 협에 따라 1 · 2 · 3 · 4등위로 나눈다. 그 다음 자모를 좌우, 즉 횡(橫)으로 병렬시키고, 운모를 상하, 즉 종(縱)으로 배열하되, 먼저 평(平) · 상(上) · 거(去) · 입(入)의 순에 따라 4단으로 나누고, 다시 같은 성조(聲調) 안의 운모들을 등위별로 나누어 배열하여 도표를 만든다.
이렇게 배열된 자모와 운모가 서로 결합하여 나타낼 것으로 예상되는 자음(字音)에 해당되는 한자들을 도표 안의 해당란에 표시한다. 자모와 운모가 서로 결합되더라도, 그에 해당되는 자음, 곧 한자가 없을 경우는 그 난은 공란으로 놓아둔다. 이러한 운도는 운서와 함께 한자의 음을 나타내는 발음사전으로 각 시대마다 작성되어왔는데, 운도의 원도(原圖)는 당나라 중기 무렵부터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대 운도 가운데서 한어(漢語)의 중고음(中古音)을 나타내는 운도로는 『운경(韻鏡)』(北宋代)과 『칠음략(七音略)』(北宋代 : 鄭樵의 通志 안의 七音略에 內外轉圖라고 수록되어 있음.)이 있고, 북송 때의 현실음을 나타낸 것으로는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성음창화도(皇極經世聲音唱和圖)』가 있으며, 송대의 중세음(中世音)을 나타내도록 만든 운도로는 남송(南宋)의 『절운지장도(切韻指掌圖)』(흔히 司馬溫公이 지었다고 해왔음.), 원나라 유감(劉鑑)의 『절운지남(切韻指南)』, 명나라 여유기(呂維祺)의 『음운일월등(音韻日月燈)』 등이 있었다.
이들 운도에 대하여 『동국정운(東國正韻)』(1447) 서문에서는 소옹과 사마온공(곧 司馬光)의 운도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고, 『사성통고(四聲通攷)』(1455) 범례에서도 ‘이도운제서(以圖韻諸書)’ 또는 ‘불합도운자(不合圖韻者)’라고 하여 훈민정음 창제시절의 우리나라 언어학자들이 여러 가지 운도와 운서를 참고하였음을 증언하고 있으나, 훈민정음 창제 때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운도는 소옹의 『황극경세성음창화도』였다.
이 전통은 조선시대 후기까지 그대로 이어져서, 다른 운도에 관심을 가졌던 저술은 나타나지 않고 소옹의 운도에만 관심이 계속되어, 중종 때 서경덕(徐敬德)이 『경세성음(經世聲音)』에 관하여 언급한 것이 있고, 숙종 때의 최석정(崔錫鼎)은 1678년(숙종 4) 소옹의 운도를 본받은 『경세정운(經世正韻)』을 지어 일종의 운도편찬을 꾀하였으며, 1750년(영조 26) 신경준(申景濬)이 지은 『운해훈민정음(韻解訓民正音)』도 소옹의 운도를 본받아 끝부분에 가서 운도를 작성한 것이었다.
같은 시대의 황윤석(黃胤錫)은 그의 저서인 『이수신편(理藪新編)』에서 운도에 대하여 상세히 논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