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9년(중종 14)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영흥부사·경상우도수사를 거쳐,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인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왜선 70여척이 달량포(達梁浦)에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자, 이에 항전하였다.
그러나 성안에 양식이 떨어지자 군민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의립(衣笠)을 벗게 하여 항복할 뜻을 적에게 보였다. 그러나 성을 뛰어넘은 적에 의해서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 장흥부사 한온(韓薀)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미 죽었으나, 한 도(道)의 주장(主將)으로서 먼저 항복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가산을 적몰(籍沒)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