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제1군단은 1951년 9월 6일 향로봉∼건봉산∼송현리를 잇는 선상에 주저항선을 형성하여 북괴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후 10월 10일 예하 수도사단으로 고성 일대의 전술적 요충인 월비산을 선제공격하게 함으로써 월비산 · 351고지 전투가 개시되었다.
월비산은 건봉산(乾鳳山) 줄기가 동해로 뻗으면서 형성된 표고 459m로 고성(高城) 서남쪽 5㎞ 지점에 돌출한 산이다. 국군 제1군단장은 지형상 월비산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수도사단장에게 그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에 수도사단은 제1기갑연대로 하여금 1951년 10월 10일 공격의 발판이 되는 148고지∼351고지를 공격하도록 하여 이를 탈취하였다.
10월 12일부터 3일간 제1기갑연대는 월비산을 목표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북괴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간신히 261고지와 350고지(DT 398756)까지 진출하는 데 그쳤다. 수도사단 사령부에서는 병력을 집중투입하기로 작전계획을 수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기갑연대는 15일 오전에 공격을 재개하였다. 당시 유엔 공군기의 오폭으로 제3대대에서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일대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였으나, 월비산 정상으로 돌진하여 치열한 백병전을 벌인 끝에 이날 오후 마침내 월비산을 탈취하였다.
월비산 전투가 일단락되면서부터 동부전선의 상황은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수도사단은 수색과 정찰의 반복으로 북괴군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중, 군단 작전지시 제14호에 따라 책임지역을 제11사단에 인계하고, 11월 16일부로 호남지구에 창설된 백야전사령부에 배속되어 공비토벌 작전에 임하게 되었다.
한편 국군 제11사단은 작전명령 제18호로써 사단예비인 제9연대로 하여금 월비산∼261고지∼351고지∼148고지∼187고지∼36고지를 인수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제9연대는 배속 받은 대전차공격대대를 261고지와 월비산에, 사단 수색중대를 148고지 일대에 배치하여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그로부터 2일이 지난 11월 18일 저녁, 북괴 제9사단 제86연대의 1개 대대는 어둠이 깃든 후 월비산을 목표로 하여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이 고지에 배치된 대전차공격대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날 후반야에 3개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하여 방어진지를 돌파하였다.
월비산을 탈취한 북괴군 1개 대대는 그 여세를 몰아 대전차 공격대대가 351고지에 미처 방어편성을 끝마치기도 전에 급습하여 이 고지마저 장악하였다. 제11사단은 수도사단으로부터 월비산을 인수받은 지 불과 8일 만에 이를 고수하지 못하고 북괴군에게 빼앗겼으며, 339고지∼351고지∼208고지∼37고지선에 새 방어진지를 편성한 후 방어태세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 전투로 공산군 사살 891명, 포로 37명, 소총 369정 노획 등의 전과를 거두었으며, 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보다 80㎞를 더 확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