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월 16일 서울과 지방의 유생 88명이 서울 경성구락부에 모여서 조직하였다.
총독부 경무국의 협력 아래 경무국 정보위원 기쿠치(菊池謙讓)가 조종한 이 단체는 상해임시정부 안의 유림출신과 내통시켜서 임시정부를 붕괴시킬 의도에서 조직되었다.
당시 임시정부에는 영남출신 유림들이 다수 참가하였던 관계로 유도진흥회도 주로 경상·충청지방 유생으로 조직하였으며, 이 두 지방의 도지부 외에 양주·남양·장단의 경기지방과 안변·영흥의 함남지방에 군지부격인 분회가 조직되었다.
퇴폐한 유풍(儒風)의 진작과 민심의 안정 등을 표방하면서 향교부흥, 문학장려, 향약준수, 풍속개량, 효자·절부(節婦) 표창 등을 실천사항으로 하였으나, 지방관헌과 밀착되어 총독정치에의 순응을 선동하였다.
기구는 반관적체제(半官的體制)로서, 업무의 기본방침을 결정하는 장의(掌議)는 지방유림이 선발한 뒤 도지사가 임명하였다. 중심인물 김영한(金榮漢)은 중추원 찬의(贊議), 김한목(金漢睦)은 총독부 취조국위원, 정진홍(鄭鎭弘)은 중추원 부찬의를 각기 병합 직후부터 맡아 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