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사휴(士休), 호는 신재(信齋). 대제학을 지낸 윤근수(尹根壽)의 후손이며, 윤단(尹㙐)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윤성면(尹聖冕)이고, 아버지는 윤원(尹源)이며, 어머니는 정진(鄭津)의 딸이다. 10대 소년기에 여러 경전에 능통하여 성균관에 있을 때 이미 명성이 높았다.
1774년(영조 5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전적·병조좌랑을 거쳐 정조가 즉위하자 정언이 되었다. 이 때 왕이 세손으로 있을 때 도움을 받은 바 있는 서명선(徐命善)이 국왕의 총애를 믿고 교만방자하여 횡포가 지나치므로, 상소하여 서명선의 죄상을 극론하였다.
이어 은산현령으로 나갔다가 곧 들어와서 수찬이 되자, 다시 서명선의 문제를 거론하고, 또 윤증(尹拯)의 복관(復官)이 불가함을 주장하다가 마침내 당국자의 미움을 사서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었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풀려났다.
유배에서 돌아왔으나 윤득부에게 감정을 품은 자가 많아 편하게 지낼 수가 없었으므로, 양근(楊根)의 촌사(村舍)에 우거하였다.
1790년(정조 14) 특지(特旨)로써 경상도도사·영해부사에 임명되고, 공조참의·승지·형조참판·대사간·대사성에 이어 예조참판 겸 좌유선(左諭善)에 이르렀다. 순조가 즉위하자 윤득부의 사당에 사제(賜祭)하고 아들에게 음직(蔭職)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