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상공부의 주사 등을 지냈다. 을사조약의 체결에 반대하여 1907년 전라도 유생 나인영(羅寅永) 및 오기호(吳基鎬)·이기(李沂)·홍필주(洪弼周) 등과 손잡고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였는데, 이광수(李光秀)와 함께 정부와 일본통감부·군사령부 및 각국 공사관에 보내는 공함과 내외국민에게 포고하는 글을 짓는 역할을 맡았다.
한편, 그 해 3월 을사오적을 암살하기 위하여 결사대를 편성하고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백관이 모이는 기회를 이용, 저격하려는 계획에 참여하여 거사자금으로 2,000냥을 내었다.
이 계획에는 전 대신 이용태(李容泰), 학부협판 민형식(閔衡植), 궁중호위국회계과장 최익진(崔翼軫), 전 관리공사 서창보(徐彰輔), 전 군수 정인국(鄭寅國) 등도 가담하여 자금을 내었다.
3월 25일 동지들과 함께 거사에 나섰으나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에 부상을 입힌 것 이외에는 모두 실패하였다. 거사에 참여하였던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평리원(平理院)에서 5년의 유배형을 선고받고 진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