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징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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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와 광복군 제1지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8·15광복 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법제위원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1년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경상남도 창녕
주요 경력
광명일보 주필|신조선 부주필|민족혁명당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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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윤징우는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와 광복군 제1지대 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8·15광복 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법제위원을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조선민족혁명당과 8·15광복 후 개편된 인민공화당의 주요 인물로 활약하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였고, 북한 정권 수립에도 참여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와 광복군 제1지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8·15광복 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법제위원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인적 사항

윤징우(尹澄宇)는 경상남도 창녕에서 1911년에 태어났다. 중국의 화베이대학〔華北大學〕을 졸업하였다.

주요 활동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고, 조선의용대에 참여하여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에 들어간 뒤 「조선혁명과 조선민족혁명당」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군사 조직으로 창설된 조선의용대에 참가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한 뒤 광복군 제1지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부대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원으로 구성되었다. 1943년 2월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43년 4월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부의 차장 겸 편집과장으로 선전을 담당하였으며, 1944년 6월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서처 부비서장과 문화부 편집위원이 되었다.

8 · 15광복 후에도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하였다. 귀국 후 조선민족혁명당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2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로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여하여 상임위원이 되었다. 1947년 조선민족혁명당이 인민공화당으로 개편되면서 중앙위원과 선전부장이 되었고, 당 기관지 『광명일보』 주필로 활동하였다.

1948년 4월 인민공화당 대표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9월에는 최고인민회의 법제위원이 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에 참여하였다.

1958년 11월 『 신조선』 부주필로 활동하다가 실각한 것으로 확인된다.

참고문헌

단행본

전명혁, 『1920년대 한국사회주의 운동연구』(선인, 2006)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 2004)
이현주, 『한국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1919~1923』(일조각, 2003)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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