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높이 200㎝, 너비 58㎝, 두께 39㎝. 197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575년(선조 8) 부여현감 홍가신(洪可臣)에 의하여 건립된 의열사에 대한 내용을 수록한 사적비로 1723년(경종 3)에 건립되었다.
비문에 의하면, 홍가신이 선조 8년 만력(萬曆) 을해(乙亥), 이 고장 출신인 백제의 삼충신 성충(成忠) · 흥수(興首) · 계백(階伯)과 고려말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물러난 충신 이존오(李存吾)의 공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 것을 한탄하여 사우(祠宇)를 짓고 향사(享祀)하였다.
그러다가 1577년에 사액되었다는 사실과, 후에 조선 중기의 현사(賢士) · 학자로서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다가 남해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분사한 정택뢰(鄭澤雷)와 인조 때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 끝까지 척화를 주장하다 청나라 군사에게 피살된 황일호(黃一晧)를 추가 배향했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비는 비신(碑身)의 모서리를 죽이고 맞배지붕 형태의 돌을 얹었으며, 사면에 해서(楷書)로 쓴 비문이 있는데, 영조 때의 문신으로 시와 서화에 능하였던 정호(鄭澔)가 찬하고, 성리학의 대가로 이름을 떨친 이간(李柬)이 썼다. 원래 부여읍 용정리 망월산(望月山)에 있던 것을 1971년 사우인 의열사와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