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사비 ()

목차
관련 정보
부여 의열사비 정측면
부여 의열사비 정측면
서예
유적
국가유산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조선후기에 건립된 부여현감 홍가신이 건립한 금석각. 비석.
시도문화유산
지정 명칭
의열사비(義烈祠碑)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지정기관
충청남도
종목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유산(1976년 01월 08일 지정)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석탑로남령길 36 (부여읍)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조선후기에 건립된 부여현감 홍가신이 건립한 금석각. 비석.
내용

비의 높이 200㎝, 너비 58㎝, 두께 39㎝. 197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575년(선조 8) 부여현감 홍가신(洪可臣)에 의하여 건립된 의열사에 대한 내용을 수록한 사적비로 1723년(경종 3)에 건립되었다.

비문에 의하면, 홍가신이 선조 8년 만력(萬曆) 을해(乙亥), 이 고장 출신인 백제의 삼충신 성충(成忠) · 흥수(興首) · 계백(階伯)과 고려말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물러난 충신 이존오(李存吾)의 공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 것을 한탄하여 사우(祠宇)를 짓고 향사(享祀)하였다.

그러다가 1577년에 사액되었다는 사실과, 후에 조선 중기의 현사(賢士) · 학자로서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다가 남해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분사한 정택뢰(鄭澤雷)와 인조 때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 끝까지 척화를 주장하다 청나라 군사에게 피살된 황일호(黃一晧)를 추가 배향했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비는 비신(碑身)의 모서리를 죽이고 맞배지붕 형태의 돌을 얹었으며, 사면에 해서(楷書)로 쓴 비문이 있는데, 영조 때의 문신으로 시와 서화에 능하였던 정호(鄭澔)가 찬하고, 성리학의 대가로 이름을 떨친 이간(李柬)이 썼다. 원래 부여읍 용정리 망월산(望月山)에 있던 것을 1971년 사우인 의열사와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文化財大觀)』(충청남도, 1996)
『문화재안내문안집(文化財案內文案集) -충청남도편(忠淸南道篇)-』(문화재관리국, 1987)
관련 미디어 (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